-4.19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계승, 젊은세대 투표참여부터
■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시인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5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품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중략)/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의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쓸쓸한 혜화동 로터리에 서있는 그런 기분이 드네요.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입니다. 50년 전 오늘, 부패한 정권에 맞서 싸웠던 이른바 4.19세대들 십 수 년이 흐르고 이제 기성세대가 됐습니다. 기성세대가 돼서 돌아보는 그때의 그 모습은 어떤 걸까요? 이 시를 쓴 김광규 시인과 함께 50년 전 4.19로 돌아가 보죠. 지금은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십니다. 김광규 시인 연결해보겠습니다.
◇ 김현정 앵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몇 번을 읽어도 뭉클해지는 시예요. 저는 특히 제목이 참 좋습니다. 제목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 김광규> 제가 1960학번이거든요. 대학교 1학년 때, 중남미 보컬그룹이 부른 노래 가운데 바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번역된 노래가 있었어요. 그게 다방이나 그런 데서 이 노래를 많이 들었고... 그래서 옛사랑처럼 사라진 혁명의 열정에 대한 아쉬움이라할까, 그게 담겨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죠.
◇ 김현정 앵커> 그런데 시가 발표된 게 4.19가 끝나고 19년이 지나서 1979년이에요. 79년에 60년 4.19를 떠올린 어떤 특별한 이유, 계기가 있을까요?
◆ 김광규> 계기라기보다는 그때가 말하자면 유신시대 말기였었고, 1979년은 여러 가지 사건이 난 해입니다. 저 남쪽에서 부산, 마산 근처에서 부마사태가 발생했었고. 그리고 10월 26일 당시에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했죠. 그리고 나서 신군부가 다시 부상하고. 그때 내가 부산대학교 교수로 있었는데, 교수니까 말하자면 기성세대에 편입된 것이고, 자기가 한 25년 전에 학생으로서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학생들을 말리고, 시위운동하지 말라고 그런 입장이 됐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젊은 날과 지금 사이의 갈등이라 그럴까 그런 것을 표현하게 된 것이 바로 그해 그때 이 시가 쓰인 계기라고 볼 수 있죠.
◇ 김현정 앵커> 뒤바뀐 입장, 잊혀져가는 혁명의 기억,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좀 헛헛한 생각이 드셨군요... 4.19 당시에는 대학교 1학년이셨어요?
◆ 김광규> 그렇습니다.
◇ 김현정 앵커> 지금 50년 지났는데, 아직도 눈 감으면 그 순간 기억이 나십니까?
◆ 김광규> 젊은 날의 기억이야 평생을 두고 나죠.
◇ 김현정 앵커> 지금도 눈감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세요, 4.19 무렵?
◆ 김광규> 그럼요. 그때가 1학년이니까 시위운동 대열을 짤 때 항상 앞장서게 되잖아요.
◇ 김현정 앵커> 1학년이 앞장섰습니까?
◆ 김광규> 그럼요. 요즈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웃음) 오늘날은 청와대지만 그때는 경무대라고 불렀는데, 대통령 관저까지 진출했었고. 그때 경무관들이 발포해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죽고, 그래가지고 말하자면 사건이 커진 거죠. 사실 국민에 대해서 발포를 하는 정부는 반드시 넘어집니다. 일주일 후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겠다고 발표하고 물러났죠. 그래서 한국 현대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날이기도 합니다, 4월 19일이.
◇ 김현정 앵커> 멋모르고 앞에 섰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겁나지 않으셨어요? 열아홉, 스물인데?
◆ 김광규> 1945년에 해방되고 그 다음에 한국전쟁도 겪고 그렇지만 어떤 정치적인 의식이 젊은이들에게 형성된 시기는 아직 아니었거든요. 역사가 짧아서...그렇기 때문에 시위나갈 때야 경찰관 아저씨들이 우리한테 손을 대기야 하랴 했는데 몽둥이로 패고 나중엔 손까지 쏘고 그랬으니까... 진짜 급박한 혁명의 모든 장면을 다 연출했던 거죠.
◇ 김현정 앵커> 당시 혁명에 나섰던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고 나서 바로 학교로 복귀는 다 한 건가요?
◆ 김광규> 그렇죠. 그 중에서 정치에 뜻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조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순진한 대학생들이었으니까...
◇ 김현정 앵커> 그냥 정의, 불의를 보면 못 참아서 앞으로 나가는?
◆ 김광규> 그렇습니다. 다른 정치적인 무슨 야욕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이승만 박사 물러나겠다고 하니까 길가 청소하고 도로 학교로 돌아가서 기말고사 시험보고 그 다음에 2학기를 맞이하고 그랬었죠.
◇ 김현정 앵커> 그렇게 4.19, 그 후에는 5.18, 6월항쟁, 이런 핏값으로 지금의 민주주의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는데요. 2010년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선생님?
◆ 김광규> 4.19 이후에 지금 50년인데, 사실은 4.19 이후에 30여년을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이런 소요사태가 계속 됐었어요. 해마다 봄여름에 계속됐는데. 사실 대학생이 항상 있는 거 아니에요? 대학생은 청년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지만, 그게 대학생 시절엔 자기가 생계를 책임진다거나 자기가 부양할 가족이 있다든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정열을 발산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들의 그러한 정열이 기성세대가 보기엔 철없는 걸로 보일지 몰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역사적 발전이나 사회적 변혁에 많이 기여하고, 어떻게 보면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죠.
◇ 김현정 앵커> 요즈음 젊은이들 보면 어떠세요? 아직도 명예교수로 계시니까 학생들을 가까이서 보실 텐데...
◆ 김광규> 요즘 대학생들은 그때 비교하면 참 너무 세련되고 그랬죠. (웃음)
◇ 김현정 앵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세련됐고, 자신의 앞날을 더 챙기고 이런 것도 있고. 어떻게 보면 좀 불쌍한 것도 있어요. 너무 취직도 안 되고 해서 다들 삶에 찌들어있는 듯한 느낌도 좀 들고. 사실 1960년 4.19n하면 저만 해도 들어서 익히 알고는 있습니다만,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거든요. 지금의 10대, 20대는 말할 것도 없고요. 4.19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끝으로 한 말씀 해 주시죠.
◆ 김광규> 그 짧은 기간에 발전해온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뭐니 뭐니 해도 4.19는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 위에 오늘날 우리의 여러 가지 정치세계라든가 그런 게 생겨나게 됐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제도 가운데 뭐니 뭐니 해도 의회민주주의가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거든요. 그런데 의회민주주의를 행사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선거와 투표입니다. 딱 한 가지만 당부한다면 선거와 투표가 있을 때 거기에 참여하라는 거죠. 조금 있으면 그런 날이 돌아오는데... 날씨가 좋다고 어디 놀러가고 그러지 말고 반드시 선거와 투표에 참여하라, 그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 김현정 앵커> 참 요즈음 정치에 무관심하거든요. 젊은 세대건 기성세대건 할 것 없이. 정치에 신물이 났다고 할까요? 그래서 선거하는 날도 그렇게 많이 놀러들 가는 거 아닐까요?
◆ 김광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말하면 정치적인 동물이에요. 그러니까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투표를 통해서 참여해야죠.
◇ 김현정 앵커> 알겠습니다. 4.19를 50년 지나고 오늘 다시 한 번 그날의 기억들 되짚어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주요 인터뷰를 실시간 속기로 올려드립니다.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4/19(월) <4.19> 김광규 시인 “국민에 발포하는 정부는 망한다”
201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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