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명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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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박범신 (소설가)

‘치매를 인지한 후 그는 나를 당신이라고 자주 불렀다.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겨웠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우리가 절실하게 다잡고 싶었던 수평적 관계가 완성되는 느낌이 그 호칭에 깃들어 있었다.’ 최근 출간된 박범신 작가의 소설 ‘당신’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소설 속의 구절처럼 누군가를 부를 때 어떻게 부르느냐가 참 많은 것을 결정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칠십 평생을 영원한 청년 작가라고 불린 박범신 작가는 참 행운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박범신 작가가 작가 인생을 총망라한 9권의 책을 출간해서 화제인데요.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 직접 만나보죠. 박범신 선생님, 안녕하세요.
◆ 박범신> 네, 안녕하세요.
◇ 김현정>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했더니 9권이나 들고 나오셨어요. (웃음)
◆ 박범신> (웃음) 제가 쓴 신간은 ‘당신’이라는 장편소설 하나고요. 하나는 젊은 평론가 박상수 씨가 엮은 책이에요. 문학적 인생 43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용으로 편집된 책이고요. 제가 한 43년 동안 단편 7, 8권을 썼는데 단편문학 전집으로 출간됐죠.
◇ 김현정> 저는 그 가운데서도, 말씀하신 신간 ‘당신’, 이 이야기가 가장 꽂히더라고요.
◆ 박범신> 네. 새로 쓴 장편 소설이죠.
◇ 김현정> ‘여보, 당신’ 할 때 그 ‘당신’이죠?
◆ 박범신> 제가 사용한 ‘당신’이라는 말은 오랜 관계, 또 오래 함께한 관계에서 부르는 ‘당신’이라는 말을 전제하고 쓴 소설입니다.
◇ 김현정> 부부의 이야기. 그러고 보면 소설 속 주인공 나이하고 우리 박 선생님 나이가 몇 살 차이 나지 않으시죠?
◆ 박범신> 네. 주인공들이 저보다 조금 높은데요. 7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평생 함께 살았지만 서로 사랑에 있어서 합체 되지 않았던 인생을 살았던 두 노인이 말년에, 남편이 먼저 치매에 걸리고 그다음에 아내가 치매에 걸려서 죽어가면서 비로소 참된 사랑을 깨닫는 그런 순애보적 이야기로 돼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청년 작가’라는 호칭을 갖고 계신 박범신 선생님이, 어떻게 이 시점에서 치매라는 주제를 떠올리셨을까. 그것도 부부 이야기를.
◆ 박범신> 책에는 여러 세대의 나이가 들어 있습니다. 80이나 90 나이로 살고 있는 것 같고요. (웃음) 독자들이 ‘청년 작가’로 불러주는 것 보면 제 문학적 감수성이나 제 문장이나 이런 것들은 여전히 젊죠. 마치 노인이 젊은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 김현정> 치매라는 주제 생각하신 건 주위에서 치매환자를 경험하셨거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박범신> 작년에 장인어른께서 90세였는데 치매로 앓다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야밤에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 세대 분들은 자식들 먹여 살리고 압축성장을 위해서 헌신해 온 세대기 때문에 당신들이 오욕칠정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을 한 번도 마음놓고 해방시키면서 산 경험이 없는 삶으로 보면 불우했던 세대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분이 밤새 소리 지르는 게 어쩌면 평생 세상에 대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고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치매 걸린 뒤에 한밤중에 하시고 싶어서 소리지른단 느낌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미 사랑하는 자식들조차 그 소리가 소음처럼 들리죠. 고통스러운 소리에 불과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과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이제 굉장히 마음 아프게 느껴졌는데요. 그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하나의 모티브였습니다.
◇ 김현정> 청년의 마음으로 사는 박범신 선생님이신데. 요즘 우리 시대 청년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 박범신> 안타깝죠.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고 있는데, 그것을 개인이 맞서기가 어려운 시대예요. 그런데 사실 젊은이들은 삶의 기반은 만들어져 있지 않았는데, 세상은 지속적으로 소비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으니까 다급하고 갈팡질팡하기가 쉽죠. 그래서 이제 안타까운 거예요. 우리 세대가 훨씬 지금 젊은이들보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우리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 김현정> ‘가난했지만 희망이 있었고 길이 보였다’?
◆ 박범신> 네. 자기가 나아갈 길을 알고 있었죠. 절대 빈곤을 극복하는 강력한 사회적 명령을 받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외부에서 그들을 부추길 뿐이지, 그들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런 사회적 명령도 없는 시대가 됐죠. 그것이 청년들을 더 불안하고 쓸쓸하게 만들 수 있다고 봐요.
◇ 김현정> ‘헬조선’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선생님? (웃음)
◆ 박범신> ‘헬조선’. 들어봤죠. 우리 현실의 잘못된 구조에 대한 자기비하적인 낱말이다라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어요. ‘헬조선’을 만든 건 청년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끌고 가는 그 세상 속이라는 말이죠.
이 헬조선의 밑바탕엔, 야수와 같은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 잘 만나면 영원히 귀족처럼 살 수 있고.
◇ 김현정> 금수저라는 말처럼.
◆ 박범신> 밑바닥에서 태어나면 여간해서 삶의 형편, 환경을 자기 노력으로 바꾸기 어려운 구조. 그런 시대에 자연스럽게 나온 용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죠.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들은 나보다, 70살 먹은 나보다 기운이 세잖아. 결코 굴하지 말고 청춘이 아프고 쓸쓸한 것만이 아니라, 아프고 쓸쓸한 것을 이겨갈 수 있는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게 청춘이죠.
◇ 김현정> 좋은 말씀해 주셨어요. 얼마 전에 SNS에다가 박 선생님이 쓰신 글을 제가 봤는데. ‘우울해서 잠이 안 온다. 역사교과서 때문에 잠이 안 오고. 익명에 숨어, 이를테면 복면을 쓴 채 새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 자들 때문에 잠이 안 온다.’ 이런 글 쓰셨더라고요.
◆ 박범신> 요즘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 정치 구조 일부가 매우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 김현정> 퇴보하는 느낌이다.
◆ 박범신> 오히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느낌이, 나이 든 저로서는 정말 우울하죠. 내가 내 문제도 아닌 걸 가지고 더 우울하고 더 어둡고 그런 기분을 갖는다면 뭔가 잘못된 거 아니겠습니까.
◇ 김현정>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 2015년을 어쨌든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시점이 됐는데. 잠깐 우리 문단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표절 논란 있었습니다. 그것도 문단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작가의 표절 논란이어서 문단이 뒤숭숭했는데요. 2015년 문단, 한마디로 어떻게 보세요?
◆ 박범신> 표절 문제는 그 2개의 소설을 비교해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선배작가로서 신문에 거론되는 몇 줄 문장만을 비교해서 보고, 그 표절에 대해서 감놔라 배놔라 판단하는 것은 나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작가는 오리지널리티라고 하는 것을 버리고서는 작가의 존재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니까요. 내가 바라보는 내 관점, 단독자로서의 내 세계관이 온전하다면 표절 문제는 나오지 않을 수 있죠.
◇ 김현정> 그렇죠. 우리가 마무리는 좀 밝게 해야 될 텐데. 너무 우울한 이야기들을 많이했어요. (웃음)
◆ 박범신> (웃음) 그래요.
◇ 김현정> 2016년 새해 소망 한번 여쭐까요? 어떤 소망 가지고 계세요?
◆ 박범신> 저는 여전히 현역 작가로 살고 싶습니다. 나이에 기대거나, 나의 권위에 안주할 생각은 전혀 없고요. 올겨울부터 작품 하나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중국, 동남아 일대를 좀 폭넓게 배경으로 사용하는 그런 소설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내가 써서 행복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작가가 행복하게 쓰면 독자도 행복하게 읽겠지 생각을 하고 있죠.
◇ 김현정> 좋은 말씀이시네요. 그 소망 다 이루시는 새해 되시고요. 무엇보다 건강하셔야 돼요.
◆ 박범신> (웃음) 고맙습니다.
◇ 김현정> (웃음)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