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뜨거운 여름
김인옥
2025.08.12
조회 15
입추가 지나더니 아침, 저녁 공기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데 낮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이 더위도 시간이 지나면 물러가겠지요.
3살, 2살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던 1994년 여름 더위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 정도는 견딜 만 합니다.
당시 저는 성내동 좁은 골목길 오래된 연립주택들이 빼곡히 자리잡은 오래된 2층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이마에 땀띠가 조금씩 나더니 하룻밤 자고 나면 팔끔치, 다음 날은 엉덩이, 사타구니 순으로 번지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층 주인댁에 찾아서 옥상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아이들이 병이 나서 걱정이 되어 가족들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방과 거실에 선풍기를 하루 종일 돌렸지만 40년 만에 찾아온 찜통 더위라고 하는데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 그늘에서 놀다 식사 시간에 잠깐 집에 들어와 먹고 다시 나가기를 반복적으로 하는데 작은 애가 밤만 되면 더워서 울었습니다.
이웃집에 고3 수험생이 있었는데 공부를 하는데 울음 소리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고 아주머니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골목 하나를 두고 앞집에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우리 아이들 보기가 딱했는지 이러다 아이들 무슨 일 날 것 같다 하시며 미안해 하지 말고 낮에 당신네 거실에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염치를 무릎 쓰고 아이들 건강부터 챙겨야겠다 생각하고 어르신 대청마루로 갔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 지 아이들은 곧바로 잠을 자는데 안도가 되었습니다.
애들 돌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을 거라며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밥과 시원한 오이냉국과 냉장고 반찬들을 꺼내어 한 술 뜨라고 권했습니다.
밥이 목에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더위에 잘 먹지 못한 아이들이 눈앞에 자고 있는데 어느 부모가 밥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머니께서 아이들이 깨면 그때 먹을 것을 해 줄테니 엄마부터 얼른 먹고 기운을 내라시며 수저를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고 오며가며 인사나 겨우 하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민폐를 끼쳐도 되는지 생각은 하면서도 솔직히 배가 너무 고파서 많이 먹었습니다.
저녁에 들어가면 찜통 같은 집에 아이들은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퇴근한 남편과 낮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아이들이 더위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친정 제주도에서 당분간 지내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식사는 회사에서 해결하면 되는데 장인, 장모님이 아이들 가면 힘드실 텐데 죄송하다며 전화를 넣었습니다.
부모님께 아이들 상태를 이야기했더니 그런 상태면 진작 내려오지 말도 못하는 어린 것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겠느나며 당장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고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땅도 넗고 집도 넓어 아이들이 지내기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작은 애 땀띠를 보시더니 어머니게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쉬러 온 제게 연신 미안하다 하시며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친정이 잘 살았으면 딸이 좋은 집에서 살고 어린 것들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하시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 집값은 지방에 비해서 턱없이 비쌌고. 자식이 저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려면 부모님 허리 휘는데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부모가 없는 자식들도 있고, 친정에 못가는 딸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저는 건강한 부모님이 계시고 이럴 때 찾아올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데요, 지금처럼 든든하게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김서방이 열심히 일하고 저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일을 할 계획이에요. 빨리 자리 잡고 잘 사는 모습 보여 드릴게요. 아셨죠."
태풍이 두 번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두 어달 사이에 쑥쑥 자란 아이들은 보고 남편은 아이들 볼에 뽀뽀를 수도 없이 했습니다
앞집 할머니 집에 아이들과 함께 가서 제주도에서 가져온 건어물을 드리고 베풀어주신 따뜻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은혜를 잊지 않고 열심히 살고 어르신들처럼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삶은 본받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 심심해서 옥상에 물주며 키운 무공해 농산물이라며 열무와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를 한바구니 가득 주셨습니다.
“다시 민폐를 끼치는군요”
말씀드렸더니
"아이 돌보느라 고생이 많아요, 올해는 너무 더워서 아기 있는 집들은 고생이 많겠어요, 우리 세대야 콩도 나누어 먹으며 자라서 아무렇지도 않으니 편히 받아요."
이분들은 천사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을 만났지, 분명 꿈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해 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자 성내동 어르신 집을 찾아 갔습니다. 벨을 눌렀는데 모르는 분이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사하고 2년 후에 어르신들은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웃이 어려울 때 당신네 거실을 내주며 아이들을 쉬게 해 준 잊지 못할 분들인데 안부를 여쭤볼 수는 없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신청곡 : 조항조의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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