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닮아가는 친구
조현미
2001.08.19
조회 36
장대비가 씻고 지나간 거리는
녹차잎을 우려낸 것처럼 싱그럽습니다.
거실 창문을 여니 더위 먹은 바람이 햇살에 묻어 비좁은 집안을가득 채우네요..
창밖으로 보이는 대추나무엔 아직도 간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푸른 잎사귀사이로 반짝 반짝 빛나는 빗방울이
마치 잘 여문 대추알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찬 녹차 한잔을 마시며 아름다운 얼굴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며칠 전, 우리 가족은 이른 피서를 다녀 왔습니다.
복잡한 휴가철을 피하기 위해 미리 휴가를 당긴 것이지요.
처음에 피서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때마침 시골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해왔길래
그친구에게 말했더니 선뜻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 겁니다.
염치불구하고 응했지요.떠나기 전날, 아이스박스에 고기며 필요한 밑반찬과 과일을 넉넉하게 준비해 넣고 빠진것은 없는지 한번 더 점검을 하는데
문득 생각이 친구의 시어머님께로 머무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이친구의 아이 돌 때 친구집을 방문했었는데
친구의 시어머니께서 오랜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모습을 뵈었었어요. 마침 인천의 송도 부근에 관절염 치료에 전문이라는 한약방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 우리는 떠나던 날, 물어 물어 송도의 약방으로 향했지요.
그리곤 한약 한재를 지어 가지고 친구네 집으로 향했답니다.친구는 서울의 사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커리어우먼으로 일하다가 몇 년전 남편을 따라 남편의 시댁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 서툰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요. 이친구가 매년 가을에 추수를 하면 그 귀한 알곡들을
저에게 보내주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철철이 빛깔고운 고추가루며 감칠맛 나는 참기름을 원없이 먹을 수 있엇지만 미안한 마음에 성의표시를 할라치면 그것마저도 서운해 하니 문제랍니다.
그날도 그랬지요..
오랫만에 마셔보는 시골공기와 옛날 이야기로 보낸 이박삼일은 짧기만 하더군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오던 날, 친구는 시어머님께 지어드린 약값을 쥐어주려고 한바탕 난리입니다.
그동안 공짜로 얻어먹은 햇곡식이며 양념 값이라며 겨우 사양하고 돌아왔는데요...
친구 집에 머무는 동안, 매 끼니 때마다 풍성한 상차림에 염치불구하고 밥 한두그릇을 뚝딱 비우는 저를, 이친구가 유심히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도 남편과 저의 젓가락이 자주 오가던 총각김치를 김치통으로 가득
담아서 보자기에 싸주는 겁니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에 김치를 넣으려고 보자기를 풀어보니, 하얀 봉투 하나가
들어 있지 않겠어요? 안을 보니, 어느새 넣었는지 만원짜리 지폐 열장이 담겨있는 겁니다.
이 친구, 나 모르게 몰래 김치를 챙기며 돈을 넣어 둔 모양입니다. 대뜸 전화를 해서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더니 자기는 죽어도 모르는 일이랍니다.
이런 친구가 또 있을까요?
학창시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힘들때마다 남 모르게 빛 좋은 관심을 보여주던 친구는 아직도 저의 보호자인양 챙기려 든답니다.
고마움이야 이루말할 수 없지만 너무 받기만 하다보니
미안한 마음에 친구 볼 낯이 없네요.
충남 지방에 비가 많이 왔다는데 걱정스런 마음에 전화를 해보니 식구들 모두 들에 나갔는지 받지를 않습니다.
친구가 자식처럼 가꾸어 온 고추며 곡식들이 제발 무사하기만을 빌어 봅니다.
지금쯤 고추밭에서 허리를 구부리며 더위와 싸우고 있을 친구에게 힘내라고 한마디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한마디 곁들이고 싶어요.
산울림 동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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