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참여* 눈 내리던 밤
수정
2001.11.19
조회 42
워낙 썰렁하게 살아온 때문인지
첫눈 오면 만나자던 약속을 한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눈 오면 다음날 거리가 온통 추적추적할 생각에,
게다가 얼어붙기라도 하면 거리가 마비될 걱정에
오히려 심란함부터 느끼는 심뽀 -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었
다는 증거일까요.

오래전 눈이 많이 왔던 어떤 밤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백수 시절이었죠.
이번만은 기어이 올나이트(토속영어)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욕과 기대로 가슴 설레며 친구랑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밤기차 타고 부산에 가 보자는 약속을 진작에
해 두었더랬죠.
친구가 누구냐구요? 그 때 저는 스물네살이었고 백수였고
대책없이 젊기만 했으니 그런 친구가 있었죠.
그가 씨익 하고 웃으면 온세상이 밝게 느껴질 만큼 멋진
사람이었지요.
좀처럼 눈이 잘 안 오는 그 동네에 왠일로 눈까지 많이
내려 가뜩이나 크리스마스로 들뜬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도 예외없이 어머니의 외출금지령이 내려졌습
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거죠.
사실 백수인 제 입장에선 크리스마스만이라도 가족과
떨어져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사정을 봐주지도 않으
실뿐 더러 제 스스로 좀 설득해보려고 노력할 만큼 당당하
지도 못했지요.

핸드폰이 있나 삐삐가 있나 도저히 못 나가겠다고 연락도
못하고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나고 가끔씩 전화벨이 울리기도 했지만
번번히 제가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야! 이거 누구냐 ? 전화벨 세 번 만 울리고 자꾸 끊는 게
누구냐? 니 전화 아니냐"
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감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나의 비겁함과 소심함.
약속한 아홉시는 이미 지나가고 10시, 11시가 지나고 12시
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지나고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
네요.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약속을 끝내 어긴 채 오지 않
는 잠을 청할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습니다.
차마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습니다
" 응! 못 나오지? 그럴 것 같았어. 근데 잠깐만 창문 좀
내다봐 줄래?"
하고 전화는 끊겼습니다.
조심스레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려다보았죠. 우리 아파트
는 5층이었습니다.
근처 슈퍼마켓의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한 후 그는 어느새
우리 집 아래로 달려왔나봅니다.
하얀 눈이 쌓인 아파트 입구에 선 그 애가 나를 보고 웃으
며 손을 흔들어주고 갔습니다.
화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우리 사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
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눈이 오면 생각납니다.
세상은 하얗고 아직 눈이 녹기 전의 설레임으로 가득찬 밤.
대책없이 누군가의 집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다 손 한 번 흔
들고 돌아가도 환하게 웃던 착하고 순진하던 날의 기억이
나는 이렇게 생생한데 그는 잊었을까요?


듣고 싶은 노래는
조하문의 [같은 하늘 아래]
봄여름가을겨울의 [열일곱스물넷]

* 김수정
***-****-****
hydra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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