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 ‘배성’의 ‘망향’
김도현
2015.02.18
조회 844
환갑이 되는 해 정월 대보름날 여의도 귀신바위에 걸터앉아 ‘배성’의 ‘망향’을 불러보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 익환이는 이 자리에 없다. 보름달 속에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 옛날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나는 사람들이 여의도 귀신바위 앞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그 해의 소원을 빌면서 차려놓은 음식들을 얻어먹기 위해 여의도 귀신바위를 찾었다. 사춘기인 내가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은 오직 귀신바위뿐이었다.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면 모든 외로움이 사라졌다. 그 날 따라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고 여의도 비행장 불빛은 시간에 맞춰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저만치서 그 당시 애창되던 노래 배성의 망향을 부르면서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며칠 전 같은 반이 된 익환이였다 그는 대뜸 내 노래 어떠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다시 한 번 불러볼까? 그는 내가 동의도 하기 전에 씽긋 웃더니 배성의 망향을 불러제켰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유난스레 반짝이는 눈동자는 보름달 빛에 비쳐서 더욱 더 반짝거렸는데 왠지 모르게 커다란 외로움을 호소하는 눈동자였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움직이는 동그란 입 모양은 너무 앙증맞고 예뻤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어보니 그와 나는 전생에 형제처럼 닮은 점이 많았다. 아니 아주 똑같은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폐결핵 말기였다. 나의 아버지도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는데 참으로 내 처지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폐결핵환자라는 이유로 친구들은 집에 놀러 오는 것을 꺼려했고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당연히 사춘기인 익환이가 외톨이가 되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고향은 그리운 친구들을 얘기하는 거야! 정말이지 친구들이 그리워! 그렇게 얘기하는 익환이의 모습은 아주 애처롭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어느 날 급기야는 사나이 약속을 했다. 내가 먼저 제안했다. 포도주에 피를 타서 같이 마시자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서는 포도주에 섞었다. 한쪽 팔을 서로 걸친 채 사나이 약속을 굳게 맺었다.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꼭 성공을 해서 환갑이 되는 해 정월 대보름날 밤에 이곳 여의도 귀신바위 앞에서 만나자고. 정월 대보름날 밤이면 달을 보며 서로의 성공을 위해 빌어주자고. 우린 각기 다른 대학에 진학을 했고 만남이 뜸해지더니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우린 그냥 여느 친구들처럼 시시하게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면 우리 둘만의 시간에 푹 빠져버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 한구석엔 똑같은 속도로 앞길을 가야 한다는 라이벌 의식 같은 강박관념도 있었다. 익환이는 대학과 ROTC를 수석으로 졸업하더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나는 두뇌 방면에선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재능을 살려 음반도 발표하고 TV 드라마에도 나가보고 신문에 칼럼도 쓰면서 열심히 뛰었는데 나도 이렇게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익환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환갑이 되는 해 성공해서 만나자는 사나이 약속은 나의 목표이자 질긴 끈이었다.
마음이 느슨해질 때 그 끈을 잡아당기면 힘이 생겼다. 그와 연락이 두절된 지 30년 만이었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도현아 보고 싶었어. 사나이 약속 잊지 않았겠지? 상상도 못 했던 그리운 친구 익환이였다. 환갑이 되는 해 너한테 아주 큰 선물을 안겨주려고 했는데 너하고 보냈던 철없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구나! 그놈의 출세가 뭔지 그걸 쫓아가다 췌장암에 걸렸어! 말기래! 너한테 꼭 할 얘기가 있는데 내일 좀 와줄래? 꼭꼭. 익환이는 꼭이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꽤나 멀었다. 그곳을 가려면 하루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그런 거리였다. 24시를 운영하는 나로서는 선뜻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췌장암도 치료를 받으면 몇 년 몇십 년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크나 큰 오점이 되어버렸다.
며칠 후 익환이 아내로부터 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가 죽어가는 와중에 나에게 아주 큰 안 좋은 일이 생겨 자기를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죽는 순간에도 나를 애타게 찾았다고 했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의 끈도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 둘의 성공을 위해 빌고 또 빌었는데 환갑날 만날 날을 학수고대했는데 너무 허탈했다. 만남이란 목표의 끈을 잡고 있던 손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환갑이 되는 해 정월 대보름날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나는 익환이가 좋아했던 노래 망향을 소리 높여 불렀다. 얼마나 친구의 정이 그리웠으면 노래 속에 고향을 친구라고 했을까? 나는 익환이가 얘기했던 나에게 들려줄 꼭 할 말이 무엇인지 환갑 때 주겠다던 선물이 무엇이기에 애타게 꼭 와달라고 했는지 내 인생에 가장 큰 궁금증으로 남았고 만사 제켜놓고 그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고향이 그리워서 깊은 밤 별을 보고 길을 물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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