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인의 싸인과 세고비아
백승현
2015.07.13
조회 77
그러니까 지금부터 33년 전 얘기입니다. 그때 제가 살던 곳은 경북에 위치한 영주란 조그마한 도시였습니다. 공부 잘하고 얌전하고 내성적인 나는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열심히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때, 누나가 예민한 청춘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위로 네 살 터울이 지던 누나는 늘 나에겐 모방의 원형이자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조그마한 소읍인 영주에서 누나는 뭇 남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겁나게 재미나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걸스카웃에, 문예부에, 악대부에 도대체 하지 않는 게 무얼까가 궁금할 정도로 누나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저는 늘 그런 누나에게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그런 우상이던 누나가 저에게 하나의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 제안이란 다름아닌 이런 거였어요. 시내에 새로 개업한 명동의류라는 옷가게에 홍보차 유지인이 내려와 몇 시간 사인회를 연다는 겁니다. 그곳엘 가서 유지인 사인을 받아오면 본인 용돈으로 세고비아 기타를 사서 합창대회 의무곡인 홀라히 홀라호를 가르쳐 준다는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중학교 합창단에 뽑혔었고, 처녀 음악 선생님은 어린 까까머리 중학생의 순애보 대상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외국 번안곡인 '홀라히 홀라호'를, 대회를 앞두고 목이 터져라 연습하던 내 모습을. 물론 음악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이었죠. 집합 연습을 끝내고도 집에서 발성 연습을 했지만 어색했습니다. 무반주의 고통이라고나 할까요? 문득 누가 기타로 반주를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타 선생님은 레이프 가렛을 좋아하던 팔방미인, 누나의 역할이었겠죠.

흔쾌히 나는 누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엄마를 졸라 멋진 옷을 사입고는 시내에 위치한 삼화다방인가엘 갔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 유지인 씨가 다소곳하게 앉아있었고 나는 당시로는 소읍에서 엄청난 인파인 약 50명 정도의 인의장벽을 뚫고 다방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거기서 경호원 비슷한 아저씨들에 의해 달랑 들려 나는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다방 문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습니다. 또래들이 넘어진 나를 보고 거봐라하며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다방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기타 때문인지, 유지인 씨 때문인지 도대체 왜 그랬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싸인 행사를 시작하기도 전 대기중인 조그마한 다방에서 엄청난 꼬마 열성 팬을 만났다는 사실이 어쩌면 유지인 씨를 만족시켜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무사히 유지인 씨의 싸인을 득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던 유지인 씨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역시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더군요. 유지인 씨~! 고맙습니다. 늦게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나는 당시 유지인 씨의 싸인을 앨범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행이 누나가 명함 뒷면에 적인 싸인을 버리지 않았더군요. 가끔씩 영주 고향에 내려가 누렇게 묵은 앨범을 들추며 그때를 떠올립니다. 내성적이던 15세 중학생이 그런 용기를 냈다는 게 난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물론 누나는 기타 반주자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어느날, 나는 모 방송국 입구에서 유지인 씨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절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기억을 못하더군요! 그렇지만 전 그 이후로도 유지인 씨를 먼발치에서나마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하하! 유지인 씨를 만나기 위해 제가 방송국 직원이 됐으니까요~!

후일담이지만 아쉽게도 합창대회는 입상권에 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추억은 방울방울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까요. 음악선생님 방울, 누나 방울, 유지인 방울. 그게 지금의 나를 키운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만간 유지인 싸인을 다시 받아볼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떡할까요? 누나에게 전화라도 한 통 넣어볼까요?

댓글

()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