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기타, 그리고 장은아의 작은나비
hismuse
201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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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할 때 주로 cbs 음악 fm을 듣습니다. 박승화의 가요속으로에서는 DJ님의 라이브도 좋지만 들을 때마다 옛 추억 한 토막을 떠올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전기기타 선물 소개하는 그 순간입니다. 기타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 방송을 듣는 건 아닌데 듣다 보면 DJ님이 전기기타를 소개하고 그 때마다 같은 추억이 떠오르고 뭐 그렇습니다.

대학생 시절 교회 성서 연구반 활동을 했습니다. 우리 반은 한 예닐곱 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 중에 바로 옆동네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도 하나 있었습니다. A라고 부르겠습니다. A와는 그다지 친할 것도, 친하지 않을 것도 없었습니다. A는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역시 나를 살갑게 대하지도, 살갑지 않게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모임이 매우 늦게 끝났습니다. 밤 12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고 버스나 지하철이 모두 끊겼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A는 지방의 소도시에 살고 있었고 나더러 집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차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태워다 줬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함께 산책을 하자더군요. 그런데 어디로 산책을 했느냐… 진흙탕이었습니다, 진짜 진흙탕입니다. 연근을 재배하는 논이죠. 마침 연꽃이 만개한 때였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더군요. 나도 그냥 한참을 따라 다녔습니다. 연인 관계도 아닌 두 남녀가 한밤중에, 그것도 사람 키만한 연꽃 사이를 헤집으며 진흙탕을 누비는 이상한 산책… 더구나 A는 그날 흰색 원피스에 단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물론 밤에 보는 연꽃이 매우 아름답기는 하더군요. 아마 A네가 재배하는 연은 아니었을 겁니다. A는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의사를 하는 집이었으니까요. 산책을 끝내고 나는 정강이까지 진흙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번은 밤에 갑자기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죠. 아마 교회에서 하는 일을 주제로 사무적인 대화를 나눴을 겁니다. 그 날 대화 중 단 한 가지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20분쯤 후에 우리 집으로 전화해 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중간에 화장실에 갔거나 다른 집안 일이 있거나 했겠죠? 그래서 20분을 기다렸다가 A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웬 나이 든 남자가 전화를 받더군요. A의 아버지였습니다. A 아버지는 무슨 외간 남자가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다 큰 처녀를 찾느냐, 뭐 이런 내용을 골자로 매우 화를 냈습니다. 나는 당황하고 억울했지만 “A가 걸라고 해서 건 건데요…”라는 핑계도 제대로 못 대고 길게 꾸중을 듣기만 했습니다. 그 다음 모임에서 A를 만났지만 A는 이에 대해서 전혀 해명하지 않았고 나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3자의 시각에서는 내가 A를 짝사랑하여 늦은 시간까지 이를테면 만나달라고 또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집으로 전화한 그런 구도일 게 분명하니까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오해를 사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한 번은 내가 교회 악기실에 혼자 앉아서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데 A가 슬그머니 들어왔습니다.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뭔가를 연주하더군요. 길게도 쳤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아무 말 없이 나갔습니다. 난 A가 왜, 무엇을 연주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난 여자친구와 사귀고 있었습니다. 여자친구와 A도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였습니다. 한 번은 교회 모임이 끝나고 술자리를 가졌는데 어쩌다 보니 A와 단 둘이만 남게 됐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A는 매우 또렷한 눈빛과 목소리로 내 여자친구에 대해서 건조한, 하지만 상당히 비난 섞인 평가를 했습니다. 지성적이지 않고 경박하다,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기분이 나빴지만 역시 그냥 넘어갔습니다. 내가 A와 여자친구를 놓고 서로 비교한다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A는 영국의 한 의대로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렇게 다시 2-3년이나 흘렀을까, 당시 유행하던 미니 홈피를 통해 A가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자기가 묵고 있는 곳을 이리저리 소개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한국에 잠깐 들른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잊고 있었는데 몇 주일 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 보자더군요. 우리는 함께 활동했던 교회 부근에서 만났습니다. A는 관짝 같이 긴 뭔가를 등에 짊어지고, 손에도 묵직해 보이는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매우 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영국에 있는 동안은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하고 있어서 아주 세련되게 변해 있었습니다.

A는 나를 데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악기실 옆 복도에 전기 아웃렛이 있는데 거기에 관짝과 박스를 내려 놓고 풀기 시작했습니다. 관짝 안에서 나온 건 터키석처럼 파랗게 반짝이는 전기기타였습니다. 손에 들고 온 상자는 기타 앰프더군요. 그리고는 말없이 뭔가를 한참 연주했습니다. 그다지 친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한 여성이 전기기타와 앰프를 직접 짊어지고 2-3년만에 영불해협과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나타나서는 차가운 교회 복도에 주저앉아 아무 말도 없이 뭔가를 연주하고 있는 겁니다. 연주는 한 10분 정도 계속됐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왜 연주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연주를 끝낸 A는 기타와 앰프를 주섬주섬 정리해서 챙기고는 밥을 먹자고 했습니다. 아마 근처 어딘가에서 매우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었을 겁니다.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A가 한국으로 돌아와 한 대학병원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연락이 왔습니다. A는 내 여자친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난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오래라고 답했습니다. 전화 끝에 A는 산책을 하자고 했습니다. 난 A와 산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A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날 내가 A를 만나러 나갔다면 A는 달빛 교교한 연밭 진흙탕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아무 말 없이 전기기타를 연주했을 것만 같습니다. 앰프는 어디에 연결해야 하나…

몇 년 전, 기타를 배웠습니다. 통기타를 한참 배우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전기기타를 연주해보고 싶지 않냐고 그러더군요. 배워보고는 싶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A가 생각났습니다.

박승화의 가요속으로에서 전기기타 상품 소개를 할 때마다 역시 A가 생각납니다. 아직 전기기타를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A는 내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요. 난 가끔 궁금합니다.

A에게, 또는 나에게 전하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장은아의 작은나비.

사실, 내가 꼭 듣고 싶습니다. A는 이 방송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3자의 시각에서는 내가 A를 짝사랑했지만 그 마음을 들킬까봐 스스로까지를 속였던 구도일 게 분명하니까요. 좋아하나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오해를 사기는 정말 싫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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