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에 들어 온지 어언 1년이 지나 이제 중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 되어 입학소감문을 쓰려하니 감회가 새롭다.
두렵고 떨리던 그 때의 내 모습. 가방을 메고 이대역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은 모두 아줌마들로 꽉 차 있어 창피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처럼 당당해져 있다. 이제 양원인으로 우뚝 서 있는 기분이다.
작년 중학교 첫 국어 시간에 참석을 못 했는데 짝꿍이 윤동주의 ‘새로운 길’을 외워 오는 것이 숙제라 해서 열심히 외웠다.
그리고 ‘만학의 길’이란 제목으로 패러디해서 글도 썼다.
만학의 길
마을버스 타고 전철 타고
환승하고 걸어서
어제도 가고 내일도 갈
나의 길 즐거운 길
개나리 피고 바람이 불고
봄이 나를 유혹해도
나의 길은 언제나 즐거운 길
오늘도 내일도
마을버스 타고 전철 타고
환승하고 걸어서
이 글을 써서 국어시간에 ‘새로운 길’과 함께 발표했다. 국어선생님이 학교 게시판에 내 글을 올려 주시는 바람에 반에서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주목까지 받게 되었다.
그 계기로 스승의 날 행사로 담임선생님께 편지 쓰는 것을 내가 대표로 하게 되었고, 또 시화전에 내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림이라고는 새 한 마리도 제대로 못 그리는 내가 글을 쓰고 몇 번이나 다시 그리며 그림 작업을 하였다. 시화전에 내 작품을 전시하고 급우들과 아들들의 축하를 받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절기 입학식에서는 축시 낭송의 영광도 가졌다. 또한 처음엔 그림처럼 그리던 한자를 익혀 처음 한자읽기 6급 시험을 밤낮으로 준비하면서 매달렸다. 합격까지의 과정을 학교 게시판에 ‘한자 6급 도전기’란 글을 써 올리면서까지 기뻐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나의 어린 시절 어머.한테 늘 듣는 말이 공부 못 한다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도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중학교 안 보내주는 부모님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부끄럽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늘 웅크려있는 기분이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 다 보내고 쌍둥이 아들 공부까지 다 마치고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하는 시기에 인생의 소낙비를 만났다.
나는 그 비를 피할 처마 밑이 필요했고 그것이 양원이 되어 주었다. 하루에 통학거리 4시간 20분, 수업시간보다 더 긴 통학시간으로 체력적으로는 힘들었는데 학교만 오면 웃을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 동안 나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참 신기해 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며 학비를 따로 못내 주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 했다.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1년 동안 학비가 얼마나 들어 가냐고 묻기에 “왜, 누구 소개 하려고?” 했더니 “아니, 그냥 궁금해서.”하더니 통장으로 이백만 원을 보내왔다.
‘아! 이 돈을 만들려고 어디서 알바를 했겠구나!’ 싶으니 참으로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 동안 아들도 카드 하나를 건네주며 차비하라 했었는데 이렇게 두루두루 사랑의 선물을 먹으며 나의 여고 시절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교장선생님은 상장 하나, 임명장 하나도 그냥 주시는 법이 없다. 꼭 당부의 말씀과 스스로 자존감을 갖게끔 훈시를 하신다. 양원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시는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그 뜻을 따르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우리가 아름다운 내일의 꿈을 꾸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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