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풍 같은 인생을 신청합니다.
신양옥
2017.10.24
조회 51
지금부터60여 전,
한국전쟁도 휴전 되고 어른들은 복구에 열중일 적에
어린 우리들은 그래도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제가 6학년이었으니 지금 하늘나라로 유학을 간 동생은
4학년이었지요.
소풍을 간다고 해봤자 신촌에 살았으니까
새 절이라 불리는 봉원사가 전부였습니다.
집엔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로 이민을 가 안 계시고
병으로 아내를 잃은 젊은 아버지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저,
그리고 4학년이던 큰 동생, 초등학교 1학년이던 막내,
이렇게 네 식구가 우리 가족의 전부였습니다.
휴전 직후라 아버지는 가장임에도
우리 세 자식을 먹여살릴만한 뾰족한 재주가 없었습니다.
우린 함경도 신고산에서 1.4후퇴가 아닌
1945년 10월에 월남을 했기에
피붙이도, 재산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집은 대현동 산꼭대기였는데 그나마 우리 집도 아니었기에
주인 집 애들에게 동생들이 많이 맞기도 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우리 집.
석유불로 밤을 밝힐 때 산 아래 신촌은 전깃불로 환했습니다.
그러면 배가 고파 아버지를 기다리던 막내는
“아버지 언제와?”
“저렇게 밝은 집이 많은데 우리 집은 왜 없어?”
이렇게 물을 때마다제내 마음은 무척 아팠답니다.
시간이 흘러 가을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가을 소풍 이래 봤자 봄과 같은 장소인 봉원사였지요.
같은 장소로 전 학년이 다 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집엔 먹을 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안에 아버지 다음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6학년임에도 동생들에게 소풍 도시락을 챙겨줘야만 했답니다.
집안에 있는 곡식이라고 수수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수수로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밥을 동생에게 소풍용 도시락으로 건네주었습니다.
수수밥알은 하나 같이 숟가락에서 따로 놀았습니다.
그 때만해도 저는 수수가 차지지 못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답니다.
...
그렇게 동생이 소풍을 간 줄 알고 저도 소풍이라고 봉원사로 갔다가 왔습니다.
저녁.
밤이 깊었음에도 큰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비록 휴전 직후라 하더라도
부모가 있는 집에서는 어떻게든 먹을 것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는데
부모 둘이 있어도 버거운 현실에서
홀아버지 혼자서 어린 자식 셋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안 들어오셨는데 아버지께서 알까봐 걱정이 되었답니다.
늦은 저녁, 동생은 해맑게 웃으며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누나, 이 거 받아. 그리고 오늘 저녁은 쌀밥해 먹자.”
하는 겁니다.
뭔가 하고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한 되 정도 쌀이 들어있었습니다.
반가우면서도 불안했습니다.
“야, 너 이거 웬 거냐?”
하자 동생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답니다.
“이게 뭐냐고!”
“쌀......”
“쌀이란 것 아는데 이거 어디서 훔쳤냐!”
동생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초등학교 4학년이던 동생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답니다.
“나 오늘 소풍 안 갔어.
영천에 가서 구두 닦았어.
그리고 거기서 쌀 사줘서 그거 받아온 거야.
이 거 훔친 거 아냐.”
저는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소풍 가랬지, 누가 나가서 구두 닦아 쌀 사오랬어!”
때리는저나도 울고 맞은 동생도 울었답니다.
그렇게60여 년이 지난 지금,
동생은 엄마가 그리워
30여 년 전에 엄마를 찾아 하늘나라로 유학을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추가열의 소풍 같은 인생을 신청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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