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상자>
출퇴근 시간에 라디오 음악방송을 주로 듣습니다.
즐겨듣는 채널을 고정시킨 채 몇 년을 듣다 보니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어느새 가족들 목소리 마냥 익숙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길에 늘 듣는 ‘박가속’에 채널을 맞추었습니다.
곧이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날의 청취자 사연을 소개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유리상자 속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조금은 짓궂은 질문에 박승화씨의 재치 있는 답이 이어졌습니다.
“예전에 젊었을 때는요, 인터뷰할 때, ‘유리상자는 소중하니까
귀한 것들을 담고 싶어요. 우리 노래도 유리상자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오래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고 다녔어요”
라고 했습니다.
뭔가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젊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요, 요즘은요, 음~~ 그냥 아무거나 막 집어넣어요.
때때로 내가 뭘 집어넣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요 ㅎㅎ”
순간 웃음이 터졌습니다. DJ의 유머가 신선하기도 했고
청취자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친근해 보여서 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죠.
젊었을 때는 삶이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만했습니다.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 줘도 ‘맞아. 맞는데.. 나는 아니야’라며
가볍게 무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한 귀로 흘려 들었던 말은 모두 옳았습니다.
세월의 옷을 한 겹, 두 겹 입다 보니 삶이란 작고 소소한 점들이 연결되어
겨우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내 삶, 귀하고 빛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상자를 통째로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온갖 남루함과 수치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불을 켜는 순간 순식간에 드러나는 옹색한 삶일지라도
그것 역시 삶의 일부가 아닐까요.
더 이상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DJ의 멘트는 누군가 흘리고 간 반짝이는 동전처럼 뜻밖의 즐거움을
전해 주었습니다. 삶에 대한 작은 진실 한 조각과 함께 말입니다.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신청합니다. 어제가 결혼기념일이었어요^^
** 제 퇴근시간에 맞춰 듣고 싶은데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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