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음악FM 매일 22:0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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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한 사람
최병진
2026.04.16
조회 17
버스 정류장, 그리고 봄 한 사람
—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안성 읍내로 나가는 통학버스를
먼저 타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언제나 설렘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동구 밖으로
노랑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던
암탉 소리가
박박 울어대던 봄날,
학교 담장에는
샛노랗게 번진 개나리가
한창이었고

버스는
양지리 마을
별다실 정류장으로
천천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누나가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나는 늘
이미 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나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그 짧은 틈 사이로
나는 재빨리
그날의 자리를
가늠했습니다

어디쯤 서 있어야
그 누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지

손잡이를 잡을지
한 발 물러설지
한 정거장 더 버틸지—
그 모든 선택은
그 누나가 올라타는 그 순간을 기준으로
치열하게 계산되었습니다

까까머리 병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보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버스 문 쪽을 향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 틈이 잠깐 열리고
그 누나가
내 곁 어딘가에 서게 되는 날이면
그건
하루의 사건이었습니다

스치듯 지나오는
은은한 크림 향—
그 향이
버스 안의 공기 속에서
나에게 닿는 순간
나는
숨을 조금 아껴 쉬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향이
흩어질까 봐

15분마다 오던 버스였지만
나는 늘
그 누나가 타는 그 시간에 맞춰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버스 안에서는
한 뼘의 거리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아주 사소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조심스럽게 선택하던
봄날이었습니다

그 시절
진달래와 개나리보다도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버스 안의 한 장면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누나를
버스 밖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만
그 봄은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그 봄은
분명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는데요
이상하게도
그때의 공기와
그때의 마음은
이렇게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절의 저는
사람을 사랑했다기보다
그 계절 속의 한 장면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시절의 봄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 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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