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을 일주일 앞둔 즈음 몇년동안 가슴에 꿈으로 간직했던 가족 여행을 실행했다.
아들은 서울에서, 우리는 대구서 출발하여 인천 공항에서 만났을 때 마침 하늘에선 소담스런 눈이 난분분 내리기 시작했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몇명이나 될까 싶게 공항은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폼페이, 피사의 사탑, 카프리섬, 나폴리, 밀라노, 물의 도시 베네치아, 아시씨, 바티칸 공화국 등 이었으나 나는 그곳의 풍광과 그곳에 살고 있는 교민들의 생활 모습과 이태리의 면면을 소개 하고자 이글을 엮어본다.
이탈리아의 호텔은 지진에 대비하여 공공 건축물의 경우 (특히 호텔)은 방과 방 사이의 벽을 얇게 하는 관계로 옆방의 소음이 그대로 전달 되었는데 깊은 밤엔 이불 끌어 당겨 덮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렸다.
또한 대부분이 욕실에 욕조가 없고 샤워기만 설치된 곳이 많으며, 샤워 할 때 물이 넘쳐 객실 카펫을 적시면 고액의 변상을 요구 한다 하니 욕조 안으로 커튼을 들여 놓는것은 기본이다.
알프스 북쪽 게르만 문화권인 독일 및 북유럽 지역은 아침 식사가 푸짐하고 다양하나 (이테리인들은 아침에 과일과 야채를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첫날, 호텔 부폐식의 초라함이라니....당혹 스러웠다) 알프스 남쪽 라틴 문화권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아침이 너무나 간단하다.(빵과 커피, 우유와 씨리얼 치즈와 햄종류가 전부다)
침대는 아주 좁았으며 방공기는 차고 건조했고 그나마 25도를 넘기지 않는 난방 시스템은 새벽엔 어김없이 꺼지곤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물과 전기와 먹을것과 넓은 침대를 향유하고 사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했다.
일조량은 사람의 생활을 다르게 한다.
이탈리아는 일조량이 풍부하다. 게르만 민족은 점심 후 휴식을 취한다.(한 두 시간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 있다. 이때는 모두가 잠시 집으로 간단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건 게르만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고 라틴계는 올리브를 주 재료로 사용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식당에서 냅킨을 곱게 접어 놓아 두면 '이집 음식이 너무 맛 없어서 두번 다시는 찾지 않겠다' 는 의사 표시라 한다. 냅킨을 꼬깃꼬깃 던져 놓아야 너무너무 잘 먹고 간다는 의사 표시라 하니 유념해 두시면 좋을듯 하다.
이탈리아의 최대 장점은 철저한 가족 중심 주의에 있다한다.
퇴근 시간이 되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고 음식을 만들 때도 가족이 함께 만들어서 하루의 피로를 씻는다고 한다.
장거리 출장자들에게 하루나 이틀 더 일 때문에 지체해 달라고 하면 낯빛이 달라 지면서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 버린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낮 12시 30분에 파하고 중고등 학교는 오후 2시엔 어김없이 하교 한다.
실제로 우리가 여행 하는 중에도 오후 2시 무렵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이후엔 각자 개성에 맞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니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교민은 유학생 위주라 '풀뿌리 문화'라 스스로를 지칭한다고 한다.
최소 5년에서 7년의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돌아 가 봐야 우리나라에서 정착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워 다시 되돌아 와서 구간구간 가이드 일을 하거나 한국인 맞이 숙박업을 하며 살고들 있었다.
마침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길 이어서 였을까?
유학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식이 결국은 가이드 일을 하며 들쭉날쭉한 수입에 허덕이며 그들 또한 한가정의 애비 역활을 해 나간다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베네치아 가이드를 맡았던 '김태욱'씨가 뱃전에서 불러주던 '오 솔레미오!'는 차라리 내 가슴을 저미고 들었다.
탁트인 음색에 부분부분의 기교까지...
부르진 못해도 청음을 알아듣는 명쾌한 귀는 있는 법이다.
허투루 공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나중에 속사정을 알고 봤더니~11년 유학 후 귀국 했으나 손에 쥐고 오는 금액이 하 기막혀 다시 이곳으로 와서 부인은 숙박업을 본인은 주야로 가이드 일을 한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 한대도 꾸역꾸역 유학생들은 넘쳐 난다고 한다.
일례로 한성당의 합창단 120명 가운데 성악 전공자가 110명 이고 모두가 자기 잘난맛에 살다보니 앞에 선 지휘자 말을 개무시 한다 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일명 베니스)에 성당이 백군데가 있다는데 이탈리아 전체에 얼마나 많은 성당이 있겠으며 성가단원중 한국인은 거의 절반을 차지 한다고 하니 그 숫자를 어림 잡아도 어마어마 하지 않는가?
이탈리아인들이 제일 좋아 하는 노래는 '노예들의 합창' 과 푸치니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이란다.
'로마'는 절대로 화려 하지 않았으며 천년 고도가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고층 빌딩도 당연히 없었다.
나폴레옹이 깔았다는 전찻길이 세월의 무게에 실려 더 고고해 보였고,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트레비 분수는 생각보다 장엄하달 정도로 크고 웅장 했으며, 세계의 젊은이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분수대 앞의 본젤라또 아이스 크림집은 그야말로 돈을 갈쿠리로 긁어 모으고 있었다.
뒷면이 완전히 허물어진 콜로세움은 그 당당한 위용 앞에 서니 피를 불렀던 그들의 선조의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듯 했다.
세계사 한쪽 페이지에 푹 찌그러진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던 피사의 사탑은 너무도 깔끔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모습으로 갸우뚱 서 있었고, 피렌체 '우피찌'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명화를 직접 눈으로 감상 하면서 벅차 오르는 가슴을 가만가만 진정 시키려 애썼으며,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는 기대에 못 미쳤으며 아파트 마다 주렁주렁 걸린 빨래들은 도시의 미관을 흐렸을 뿐 아니라 눈쌀이 찌푸려지게 했다.
당국에서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나폴리 고집은 쇠심줄 보다 더 질기다고 했다.
그들의 삶은 낡고 초라했다.
북부와 남부의 삶을 조명해 봤을 때, 우리네 남한과 북한의 차이라고 한다면 내 뻥이 너무 센걸까?
화산의 도시...폼페이.
그 잔혹함이란..주인이 묶어둔 개줄 때문에 몸부림 치다 죽은 개의 형상, 아기를 가진 임신부가 한쪽 손을 배에 대고 엎어져 죽은 자태, 모든걸 체념한것 같은 남자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리를 모은채 앉아 죽음을 맞이한 모습.
푸른 하늘과 붉은 태양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 본다는것에 참담한 비애가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명화는 바티칸 제국의 성 베드로 성당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과 '천지창조'다.
그림 감상을 위해 십여분간 목고개를 젖히고 있는데도 온몸이 저릿저릿해 왔는데 그 긴 세월을 혼자의 힘으로 완성 했다는것에 천재는 하늘의 명을 받은자임이 분명치 않을까...반문해봤다.
끊임없이 먹어본 '파스타'와 '스파게티'는 소스 냄새만으로도 비위에 거슬렸다.
현지식은 이제까지 다녀 본 여행지에서 최 하위였다. 음식과 숙박 시설은 형편 없었지만 볼거리 만큼은 단연 으뜸 이었던 이탈리아!
그들은 천년전의 그 도시에 있던 어느것 하나도 허물어 뜨리지 않고 고이 간작한 채 오늘을 살아 가고 있었고 그들의 보존 능력에 찬사와 감탄을 함께 보냈다.
오후 5시, 물의 도시에 핏빛 노을이 번지는 순간, 백개의 크고 작은 성당에서 울려 퍼지던 종소리, 소리, 소리들...
우린 마침 서로를 바라 보고 있었고 누가 먼저랄것 없이 부등켜 안고 그 울림속에 체온을 느끼며 서 있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말했다. '그순간, 감사의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더라...함께여서 벅차 오르더라...'
가족이 함께한 여정 이어서 였을테지.
우린 두고두고 이탈리아를 불쑥불쑥 꺼내어 어루만질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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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여정
황덕혜
2011.02.08
조회 73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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