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 년을 살았던 동네에 어느 때인가 전염병(?)이 돈 적이 있습니다.
그해부터 동네 집집마다에 키워졌던 대추나무에 대추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뒷마당에 두 개층을 바라보는 키 높이의 대추나무가 있던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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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 아버지는 하루 날을 잡아 조카를 데리고 마당에서 대추를 터셨는데요,
맞벌이 부부로 몇 년간 부모님 집 아랫집에 살던 언니네는
이제 막 자기 소견을 얘기할 수 있을 나이의 조카 머리에 모자를 씌워 뒷마당으로 내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나무를 흔들어 대추가 마당에 쏟아지면 조카는 좋아라 뛰어다녔습니다.
머리 위로 톡톡 대추가 떨어지면 '아야 아야'하면서, 김장할 때나 등장하는 커다란 고무 대하 밖에 떨어진 대추를 주워 담느라 정신없이 좋아했었죠.
대추를 거둔 날이면, 어머니는 온 계절 그 대추나무를 보고 다녔을 이웃에 배분하느라 바빴습니다.
나누고도 남는 대추는 추석과 이듬해 설날, 겨울 시루떡에 넉넉히 사용했고요.
김장하는 날, 품앗이하러 방문한 분들께 대접할 대추차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 무궁무진한 제공처로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사랑받던 대추나무가 그만 전염병에 맥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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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들른 집에서 어머니가, 조그만 봉투에 무언가를 담아
"이거 먹어 볼래?" 하십니다.
"그게 뭐야?"
"대추!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았니? 되게 크지? 시장 나갔다가 5천원어치 사왔다"
그러고보니 어머니가 내민 대추는 '이게 대추 맞아?' 할 정도로 컸습니다.
너무 크고, 너무 익어서 껍질이 갈라진 놈들도 꽤 되더군요.
한입 배어물어보니 맛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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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살든 대추나무가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집에 심어 키우는 나무들에 유난히 애착이 많은 부모님.
이 건실한 대추를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어머니는, 전염병에 죽어나간 대추나무 생각을 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옛날 먹던 음식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어릴 적, 집에 넘쳐나 먹지 않았던 것들이 근래들어 부쩍 그리운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대추는 한약재같기만 했는데, 어머니가 쥐어준 대추,
접시에 풀어놓고 마냥 생각 없이 먹기엔, 그래서 더 애닯습니다.
한 개를 입에 물고, 두어 개를 손에 집은 뒤 다시 봉지에 넣어 고이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가을 다가기 전에 못 먹으면 나도 차나 한번 끓여볼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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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곡이요 ; 덩크슛 (이승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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