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음악FM 매일 22:0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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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서 다신 한해를 돌아보며...
안기종
2015.12.24
조회 276
저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매년 12월 ‘꿈음’을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아이들과의 1년을 되돌아봤던 것이 올해로 벌써 4년째가 되었네요. 오늘도 사연을 적기 전에 그동안 보냈던 사연과 녹음해 놓은 것들을 다시 들어보며 지난 교직 생활을 추억해보았습니다.
제가 올해 근무하는 학교는 파주에 있는 한민고등학교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자주 이사를 다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해야하는 군인 자녀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모인 아이들이 고락을 함께하며 지내고 있는데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오늘도 가족이 아닌 친구들,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근무하던 날 밤 저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밤 8시 50분 쯤 기숙사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창문 틈사이로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뭔가 하고 창밖을 봤더니 아이들이 운동장 400미터 트랙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저 400미터 트랙을 돌뿐인데 뭐가 저렇게 신나고 재밌을까란 생각을 하며 ‘역시 애들은 애들이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매일 밤 8시 50분이 되면 어김없이 들렸습니다. 나중엔 개구리 울음 소리, 풀벌레 소리와도 뒤섞여 오묘한 화음까지 만들어 내더군요. 아이들과 친해질수록 그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제게도 의미 있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조심스레 그 대열을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다 웃고 떠들면서 걷는 것은 아니더군요.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걷는 아이들, 아예 트랙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는 아이들 옆으로, 어떤 아이는 생각에 잠겨 이어폰을 끼고 걷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우울해 하는 친구의 걸음에 보조를 맞춰가며 묵묵히 함께 걸어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음과 즐거움만이 이 트랙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슬픔, 걱정과 고민도 이 트랙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저리 순진무구하게 지치지 않고 매일 트랙을 돌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저리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감정과 마음대로 트랙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왜 어른들은 이 아이들처럼 솔직하게 걸어가지 못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 어른들의 인생길도 저 트랙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나의 인생길은 저 트랙과는 비교도 안 되게 굽이굽이 굴곡지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험난한 길이라 자임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사실은 이 반복된 트랙을 걷는 것이 너무나도 지겨워서, 더 이상 이 반복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장애물을 만들고, 핑계거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도 아이들 앞에선 가식과 허울 섞인 허세와 훈계로 자신의 삶의 길을 미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삶은 아이들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며 아이들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야 왜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개구리, 풀벌레 소리와 자연스러운 화음을 이루며 제게 들렸는지 문득 이해가 됩니다. 순진무구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 힘들고 답답해도 걸어가는 저 걸음에는 어른의 가식과 허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예전엔 다 가지고 있었지만 잊어버리고 무시했던 것을 저 아이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이 추운 날씨에도 영롱한 달빛 아래에서 크리스마스를 자축하고 한해를 마무리하며 트랙을 돌았을 한민고등학교 아이들에게 그 순진무구한 웃음과 발걸음이야말로 삶의 증거이자 가능성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힘내라! 고지가 눈앞이다.”

신청곡은 영화 송포유의 'true colors' 입니다.

* 작년 이맘때 사연이 소개되고 여러차리 녹음 파일 때문에
작가님과 제작자님을 귀찮게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송구스럽지만 감사함을 전합니다.

행복한 성탄 보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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