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지나요?
살다 보면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을 그들은 어떻게 통과해갔는지,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내가 지금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미리 정답지를 보고 싶은 수험생처럼 마음이 들썩거리는 그런 때.
백수린 작가의 단편소설 「언제나 해피엔딩」에 나오는 민주도 그랬다. 스물일곱의 민주는 지금 초조하다. 사립대학의 행정 조교로
일하고 있는 민주의 꿈은 원래 이런 게 아니었다. 많은 청춘들이 그렇듯 이상과 다른 현실을 살면서 민주도 꿈을 계속 ‘하향 조정’ 해가고
있었다. 민주는 자신이 삶의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게 되는지,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은 대상이 박 선생은 아니었다. 박 선생은 민주가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늘 쫓기는 사람처럼
기진맥진하고 피곤한 얼굴, 유행과 동떨어진 차림새,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고지식한 성격의 박 선생은 민주가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은 아니었다. 휴강인 줄 모르고 사무실에 와 갑자기 시간이 생겨버린 박 선생과 마지못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민주는 그녀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민주에게 영화관 아르바이트 시절 이야기를 꺼낸 박 선생의 이야기가 민주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민주는, 영화관 아르바이트의 제일 좋은 점을 ‘모든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본다는 점’ 으로 꼽는 박 선생의 말이 의아했다. 결말을
미리 알면 오히려 나쁜 게 아닐까. 박 선생의 다음 말에 민주는 그만 고요해지고 만다.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_ 『언제나 해피엔딩』,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백수린
스물일곱 살이 된 이래로 매일매일 초조와 불안의 시간을 보내던 민주였다. 민주는 작은 소리로 묻는다. 누군가에게 한 번쯤 묻고 싶던 말,
그러나 차마 묻지 못했던 말.
“……괜찮아지나요?”
아무런 말 없이 웃던 박 선생의 대답은 이랬다.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 다음엔 괜찮아져요.”
인생은 너무나 자주 내가 기대한 엔딩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가, 나보다 더 운이 좋은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현실. 어느 순간, 남들이 함부로 버린 팝콘과 쓰레기들로 엉망이 된 내 자리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꾸었던 꿈들 중 몇 가지나 이룰 수 있을까. 아니,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누구나 그렇게 불안에 떨며 청춘을 지나온다. 내 자리인 줄 철석같이 믿고 기쁨에 들뜨는 날도 있지만, 어느 순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를
절절하게 외치며 무대 밖으로 밀려나는 날도 있다. 우리는 꿈의 그라운드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걸 확인하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모두 묵묵히 살아간다. 그러고는 박 선생처럼 말한다. “괜찮아져요” 라고.
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매일매일 새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 이란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지금의 자리가 밀려난 자리이건,
우연히 찾게 된 구석진 자리이건, 찾다 찾다 간신히 얻게 된 자리이건 모두 그 안에서 또다시 길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만의 자리를, 나만의 무대를, 나만의 이야기를 날마다 다시 만들어간다.
나는 이제 민주가 아닌 박 선생과 가까운 나이다. 그래서 감히 짐작해보건대, 박 선생은 민주에게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만 기억하고 있다면 인생의 영화는 언제든 다시 시작되는 거라고 말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획한 인생의 엔딩은 자주 엎어질지 모른다. 인생은 영화와 달라서 등장인물도 수시로 바뀌고 예기치 못한 사건도
아무 때나 일어나니까. 그때마다 ‘체념에 얼룩지지 않은’ 박 선생의 말간 웃음이 민주를 위로했던 것처럼, 수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했던
이 말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괜찮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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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6. <세상의 모든 책>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박애희 著)) 中 《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지나요?》
전보현
2026.06.07
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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