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왜 그림을 그려요?" 한 후배가 불쑥 물었다.
"선배 왜 살아요?" 하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 전 딸이 다니던 대학에 놀러가 일주일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딸이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딸이 자주 찾는 도서관 앞에 앉아
크게 자란 나무들과 건물을 정성껏 그렸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아이고~ 어떻게 그 복잡한 나무와 도서관의 벽돌을 하나하나 다 그렸어요?"
"지루하지도 않아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혼자 대답했다. '딸이 좋아서요!'
친한 선배의 기와집이 살짝 보이는 그림이 있다. 동네 풍경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린 건데,
구도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화가로 입문하는 첫 그림 격'인 그림에
선배의 집을 숨겨 그려 넣고 싶었다. 선배 집 기와지붕은 풍광 속에서 아주 작게 그려졌지만,
뭔가 내 사랑을 몰래 심어둔 기분이었다. 동네 한 모자 집 간판에
'나는 아직도 너를 내 시 속에 숨겨놓았다(I still hide you in my poetry)'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나는 아직도 너를 내 그림 속에 숨겨놓았다'로 바꿔 큰소리 내어 읽어본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의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기억이, 추억이, 나를 그리게 하는구나!
좋아하는 사물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리게 하고, 그리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지기도 하는구나!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뒤늦게 하나씩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 것 같지만, 사방팔방 펼쳐진 세상에서 어떤 부분을 떼어내
그릴지는 어마어마한 선택이다. 물론 한두 시간 후딱 하고 마는 스케치 때는 다르다.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것을 마구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백 시간 이상을 작심하고 그려야 하는 그림의 경우,
좋아하지 않는 것을 선택해 그리긴 거의 불가능하다. 무엇인가를 애써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을 눈물 나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란 걸 그리면서 깨닫는다.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리면서 더 좋아진다.
*김미경의 <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