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1030목 마음이 편치 않을 때야말로 차를 마셔야 하는 적기
그대아침
202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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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은 공부나 연구보다는 관조나 명상에 더 가깝다.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기보다
생각이 이리저리 흐르고 흩어지도록 방치하는 것. 이를테면 운동이 아닌 춤처럼,
생각은 상승과 추락, 과장과 축소, 비약과 생략을 자유롭게 오가다 일순 비상하는 것.
사색하는 인간이었던 니체는 초인을 상상했고 세잔은 사물의 향기조차 볼 수 있노라 선언했다.
이들 사색하는 인간들의 공통된 취미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산책이고, 하나는 차마시기다.

차는 편할 때 마시면 그런대로 좋지만, 편치 않을 때야말로 차를 마셔야 하는 적기라 할 만하다.
서럽고 분하고 눈물이 멈추질 않고, 일은 꼬이고 엉켜서 퇴로가 보이지 않을 때,
불쑥, 그러니까 불쑥 일어나 물을 끓이고, 어떤 차를 마실지, 어떤 찻잔을 쓸지,
신중히 결정한 다음, 무엇보다 차를 우리는 데 전력을 다하고,
우린 차를 흘리지 않게 조심해서 찻잔에 따르고, 차향을 맡고 
차를 마시며, 찻잔의 기원이나 양식에 대해 골몰하는 이런 난데없는 허튼짓이, 
불가피해 보이던 사태의 맥을 툭툭 끊는다.
내게는 걸레를 빠는 일이나 차를 마시는 일이나 다르지 않은데,
걸레를 빨아야 할 때가 있고 차를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아침에 깨어나 마시는 차는 꿈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향긋한 교량과 같다.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나는 꿈에서 현실로 건너와 있다.
점심을 먹고 마시는 차는 산책과 흡사하다. 산책에 나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차를 마신다. 우두커니나는 아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오후 네 시에 마시는 차는 호락호락 시간에 쫓겨 살지 않겠다는 문명인의 세련된 입장 표명이다.
저녁에 마시는 차는 기도하는 것이다. 간절히 모은 두 손이 찻잔을 쥐고 있다.

차 마시는 시간은 흰수염고래와 도롱뇽의 시간처럼 새털구름의 속도가 평균 속도인 시간.
아이 곁에서 엄마가 잠이 드는 시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작은 소리들의 시간.
오래 전, 누군가가 전한 인사말, 충고의 말, 고백의 말들이 뒤늦게 도착하는 시간.
그리고 비로소 지금보다 어린 그들에게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정중히 건네는 시간.
노을 진 천변을 지나, 저녁 준비에 분주한 부엌에 이르러,
이제는 그만 찻잔을 내려놓을 시간. 달그락. 달그락.  

*김인의 <차의 기분>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