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901월 버리기 시작하면 못 버릴 것은 없다
그대아침
2025.09.01
조회 224
작업실을 옮겼다. 한곳에서 10년. 있을 만큼 있었다. 한바탕 정리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관성에 끌려다니는 나에게 실망하고 있었으니까. 
새 공기를 호흡하고 싶었다. 공기를 바꾸기 위해 공간을 바꾸기로 했다. 
새 공간으로 나를 옮기는 것으로 정리를 시도했다.
정리란 무엇일까.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두는 것이 정리일까. 
사전은 늘 이런 식이다. 가장 빤한 답을 가장 게으른 문장으로 내놓는다. 
다시, 정리란 무엇일까. 버리는 것. 그래, 이 대답이 좋다.
정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버릴 것을 버림으로써 자연스럽게 되는 것.
손의 악력을 풀어 몸과 마음 모두 가벼워지는 것.
집착이나 미련 같은 것도 버리는 것에 쑤셔 넣어 같이 버리는 것.

이사 보름 전부터 버리기를 시작했다. 먼저 카피 두 줄을 썼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 만나지 맙시다.”
정을 떼려는 카피다. 이 카피를 선봉에 세우고 10년간 쌓아온 욕심을 
무정하게 버려나갔다. 고장 난 지포라이터 다섯 개를 버렸다.
혹시 하고 켜봤는데 역시 칙칙 소리만 냈다.
잉크를 공급받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만년필 세 개도 버렸다.
세월이 흘러 이젠 가치를 알 길 없는 중국 동전, 태국 동전 수십 개도 버렸다.
주전자도 냄비도 버렸다. 회의탁자도 나무의자도 버렸다. 
갖고 있으면 필요할지 몰라, 하는 허튼 기대도 함께 버렸다.
책상 하나 데스크톱 하나 남기고 다 버렸다. 버리기 시작하니 못 버릴 것은 없었다. 
이삿짐은 가벼웠고 작은 용달 하나에 쏙 들어갔다.

버린다고 버렸는데 결국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게 하나있다. 바로 나다.
게으른 나, 비겁한 나, 교만한 나는 버리고 괜찮은 나만 데려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기는 바꿨는데 공기를 호흡할 허파는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또 살아온 대로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산다. 하지만 괜찮다. 
무거운 나는 버리고 가벼운 나를 데려왔으니 그것도 대견한 일이다.
다음 이사 땐 내 안에 사는 것들을 버릴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번 정리 때 건진 카피 한 줄을 잊지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버리기 시작하면 못 버릴 것은 없다. 

*정철의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엄치는 동사책>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