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을 준비하면서 많은 업주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중에 합정동 인근에서 빵집을 하던 친구는 이런저런 조언 끝에
한숨처럼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가 좋은 자리 구하려고 골목골목 안다녀본 데가 없는데 말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피로 물든 길이구나,
나는 지금 자영업자들이 흘린 피를 밟으며 걸어가고 있구나,
그러니까 웬만하면 이 길에 들어서지 마라.
그땐 그냥 겁주려는 소리로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가
빵집을 접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
요리를 배우던 시간들과 식당을 오픈하기 위해 우왕좌왕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어주면 위안이 되겠구나,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밥을 해 먹이면 더 큰 위안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다면, 누군가는 일부러 찾아와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잘 먹었다고 진심 어린 인사를 해주고, 그것으로 목표를 이룬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밥해 먹이고 싶었어요. 마지막 순간의 계란프라이와 같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물음에 징징거리는 비겁한 자아가 대답한다.
이게 이런 일일 줄은 몰랐다고, 위안을 주고 위안이 되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그건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고,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기술을 연마하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버스 차장의 삶이 아니라,
묵직한 전대를 차고 승객의 승하차를 제어하는 사람,
그 전대를 화려한 손놀림으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
촤르르착 오라이의 근사한 리듬을 획득한 사람,
만원 버스 안에 사람들을 욱여넣으면서도 차 문에 멋지게 매달릴 줄 아는 사람,
가끔은 곤란에 처한 어린아이에게 몇 장의 버스표나 사탕 같은 것을
베풀 줄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매달린 차 문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팔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삶이 아니니 나와는 상관없는 삶.
과연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른 나인가.
*천운영의 <쓰고 달콤한 직업>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