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접어들어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갈등한다.
동창 모임에 가면 천차만별이다. 백발거사 옆에 완전 까만 머리가 앉아 있다.
외모만으로도 열 살 이상 차이 나 보인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염색이 화제에 오르면 의견은 갈린다. 결국 논쟁의 포인트는 이거다.
젊어 보이는 게 좋은가, 아니면 원숙해 보이는 게 멋스러운가.
나는 흰머리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제 기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륜이 있어 보이겠구나 싶어 내심 싫지는 않았다.
은발 하면 남성은 작고한 신성일, 여성은 패티 김이다. 두 사람 다 얼마나 멋진가.
나도 은발에 청바지, 하얀 운동화를 꿈꿨다. 은발로 더 매력적인 외국 배우도 많다.
폴 뉴먼도 그랬고 청춘스타였던 브래드 피트나 리처드 기어는 어떤가.
조지 클루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도 중년 남자의 은발에 유혹당한다는 환상을 심어 줬다.
오죽했으면 <조지 클루니 씨, 우리 엄마랑 결혼해줘요>란 제목의 책까지 나왔을까.
어느 날 나는 문득 유심히 거울 속의 남자를 바라봤다.
흰머리가 무질서하게 삐죽삐죽 두피의 절반 이상 솟아 나온,
추레하고 총기를 잃은 초로의 사내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거기에는 젊은 오빠도, 로맨스그레이 파파도 없었다.
나는 신성일도, 리처드 기어도, 조지 클루니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로 나는 3,000원짜리 갈색 톤의 염색약을 사 거울 앞에 섰다.
염색약을 빗에 발라 쓱쓱 몇 번 빗질만 했다.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게 남아 있어야
제 머리인지 염색한 머리인지 남의 눈을 헷갈리게 하는 데 유리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백발을 가지런히 빗질해 넘기고 빨간 넥타이에 반짝반짝
광택을 낸 백구두를 신은 동창을 보면 마음이 또 흔들린다.
언제 이런 경지에 오를 것인가. 이백은 <장진주將進酒>에서 읆었다.
"황하의 물결이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듯, 아침에 푸른실 같던 머리 저녁에
눈이 됐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인생의 뜻을 알았다면 즐길지니,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지 말지어다."
*한기봉의 <바람이 내 등을 떠미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