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한 친구들에게 노래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치는 장난 중 하나다.
동요로 말할 때도 있고 가요로 말할 때도 있다. 아무 맥락 없이 침묵을 깨려고
부를 때도 있고 '이 맥락엔 이 노래지!' 떠올리면서 부를 때도 있다.
노래를 하면 즐겁고, 즐거우면 웃음이 나고, 웃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친구만 웃게 해주고 싶어서 부르는 것은 아니고 나도 웃자고 부른다.
이렇게 하찮은 거리로 웃었던 기억은, 울고 났을 때 쓸 수 있도록 모아두는
백 원, 이백 원 같은 거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사먹으며 빈둥거릴 때 쓰려고
소소하게 동전을 짤랑거리며 모아두는 셈이다.
그중 이 동요가 친구를 향해 제일 자주 나오는 노래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서 있다.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을
두드리며 애원한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자신을 살려주지 않으면
포수가 자신을 빵 쏘아 죽일 거라고. 그러면 작은 아이가 대답한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라고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번 노래한다. 안심하라는 듯이, 여기는 괜찮다는 듯이.
나는 보통, 친구가 아무런 위로도 필요없는 상황일 때, 혹은 우리 모두
한숨 울고 나서 얼굴을 씻을만해졌을 때 '작은 아이'의 입을 빌린다.
그이의 키가 180이든 150이든 덩치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작은 누구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라고 노래한다.
장소는 아무 데나 상관없다. 좀 뻔뻔해져야 한다.
엘리베이터, 아파트 복도, 가로수 아래, 매표소 앞의 차례 줄 가운데 등등.
그이가 내가 노래를 한다는 사실에 헛웃음이라도 짓게 하는 것.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잘 들리도록 부를수록 친구가 부끄러워하는 게 좋다.
친구를 살리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데, 나는 나 혼자만도 너무 많은 것처럼,
나를 위로하고 나를 미워하고 내 몸으로 바깥을 보느라 토끼에게,
내 친구들에게 너무 늦게 갈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놓고도 문까지 가는 데 천년을 쓰고 만년을 쓰는 사람 같다.
만 원, 이만 원이 턱턱 필요한데, 백 원, 이백 원 정도만 모으는 내 하찮음이
미안하다. 그래도, 기다려줘. 내가 간다.
*김복희의 <노래하는 복희>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