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1110월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는 연필로 쓴 엄마의 편지는
그대아침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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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 있는, 어린, 사랑하는 나의 딸아.
어제의 상처는 깨끗이 잊자'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아직도 첫 문장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은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책상 위에 네모 반듯하게 접혀서 올려져 있던
그 편지 위에는 익숙한 필체로 '고요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 전날에 나는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당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표 차이가 그만큼이나 날 줄은 몰랐는데.
자존심 강한 어린이였던 나는 열심히 준비한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 것보다
표 차이에 속이 쓰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이것저것 묻는 부모님께 짜증만 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린이 회장, 그게 뭐라고.
다음날 아침, 엄마의 편지를 발견하고 처음 두 줄을 읽는 순간,
눈 앞이 걷잡을 수 없이 뿌예졌다. 이어지는 위로와 사랑의 이야기가 빼곡한 편지를 
읽으면서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 걸까,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의 편지는 자주, 연필로 쓰여 있었다.
비행기로 열몇 시간 걸리는 호주로 유학 가던 날도,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방에 틀어박혀 며칠째 아무것도 하지 않던 어느 날에도,
직장 생활에 지쳐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투정하던 다음 날에도,
내 곁에는 연필로 쓰인 엄마의 편지가 있었다.
자식이 힘들 때 어느 누군가의 엄마는 소울 푸드를 만들어 먹이고
또 누군가의 엄마는 선물을 사 주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연필을 들고 편지를 적어 주었다. 

엄마의 글에는 언제나 지워진 자국과 퇴고 혹은 퇴고 비슷한 흔적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전에 썼던 말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면
비슷한 단어, 철자가 틀린 말이 보인다. 그 위로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당신의 글씨는 예쁘지 않다며, 아무래도 자기는 글솜씨가 없다며 부끄러워하는 
엄마의 표정이 보인다. 누군가 연필로 쓴 편지를 볼 때면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예찬 수필집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