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단 방향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이 말 속에는 과정이 지워져 있다.
삶이라는 과정이. 말의 뜻은 정면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 지금보다 넓은 시야로,
좀 더 나은 방향을 둘러보고 찾아보자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인데,
방향을 바꾸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해야 할 일이 있다. 속도를 줄이는 것이다.
페달에서 발을 떼는 일은 쉽지만 속도를 줄이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방향이 미래의 어느 시점을 은유한다면 속도는 현재라는 실체이다.
속도는 정강이로 튀어 오르는 흙탕물과 같다. 얼굴을 감싸는 바람이다.
속도는 온몸을 조이는 짜릿함이고 동시에 위태로운 기울기이다.
속도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은 삶의 어느 지점마다 크고 작은 쉼표를 내 의지로 놓거나,
놓지 않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내가 내 속도를 인지해야 하며, 당연하게도 내 삶과 가장 밀접한 손은 내 손이어야 한다.
하지만 최저 임금으로는, 늘 피곤에 절은 몸으로는, 취향도 취미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아무 속도에나
몸을 싣고 내 몸이 아닌 듯 쓸려 가는 것이 가격 대비 적당한 성능의 삶이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먼 깃발 같은 방향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닐지 모른다.
계절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원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내가 가진 전부일지
모른다. 다만 내가 유연하게 삶의 속도를 줄이거나 높일 수 있을 때, 바람은 두 뺨에
온기를 만든다. 적당한 온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 나는 주변을 살핀다.
시선을 따라서 풍경은 한 걸음씩 넓어진다. 풍경의 원근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내가 풍경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 방향은 나를 부를 것이고
비로소 내가 할 일은 내 앞에 기꺼이 놓인 방향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 믿는다.
내가 내 속도를 가늠할 수 없으면 수십 차례 방향을 바꾼들,
이미 알고 있는 과속을 향해 달려 나갈 뿐이다. 핸들을 꺾을 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좋은 방향을 가지는 일이란, 여전히 속도의 문제다.
*함주해의 <속도의 무늬>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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