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는 온통 아이를 키우며 사는 기간이었다.
행복했지만 이를 두고 며칠 전 딸아이에게 말했다.
“행복한 노예 생활이었어.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후회하지 않고,
어쩌면 모르는 채 시작해서 감사하는.”
아이는 까르르 웃어대며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너희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엄마는 떠돌며 살 계획이라고 하니 고등학생인 딸이 말했다.
“나는 엄마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게 왜 이렇게 후련하지?”
아이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내가 그들을 염려하는 것보다
그들이 나를 더 염려한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다. 나의 무심함은 그들에게 축복이었을까?
“엄마, 엄마가 나한테 말했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난 그에 관해서는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지금이 행복하고 미래가 두렵지 않아.
무얼 하든 나는 나대로 잘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남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아. 그건 엄마랑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해.
다만 친구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채무감이 자꾸 들어서 그게 버거워.
피곤할 때도 있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나는 그걸 고독감으로 설명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만큼은 다하는 것이 네 마음의 빚을 털어내는데 좋을 거야.
하지만 네 존재를 그들 혹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유독 외로운 사람이 있어. 그건 네 잘못도 아니고 그들의 잘못도 아니야.
어쩌면 그들도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을 테고,
자신의 고독을 잘 알고 파악하고 다룰 줄 알게 되면,
비슷한 고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더욱더 잘 알아볼 수 있게 돼,
사람은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고독을 가진 사람을 만나려고
삶의 숱한 퀘스트를 수행하며 사는지도 몰라.
비록 완수하지 못해도 자신의 고독을 파악하게 되면 말이야,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 덜 버겁게 느껴져. 네가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하길 원하는 건 오직 그 이유 때문이야.
고독을 나눌 수 있는 관계만큼 매혹적인 건 없거든.
아니, 자신의 고독이 어떤 성질인지 알게 되는 것만큼 막강한 건 없거든.
정해진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통로를 마련해둬.
네가 좀 더 만나고 싶고 넓히고 싶은 세상을 향해서."
아이는 내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를 꼭 껴안으며,
“난 엄마의 대답이 정말 좋아. 엄마는 나를 정말 잘 아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경험한 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이었고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아이는 그때만큼은 나의 고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아이에게 그런 존재임을 느꼈다.
*이서희의 <구체적 사랑>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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