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밭'이라는 말이 좋다. 누구의 밭도 아닌 '꽃'의 밭이라니.
그러니까 거긴 온전히 꽃들의 집, 식물들의 집이라는 말이다.
나의 밭이 아니라 꽃밭이어서 좋다. 그러니까 그들 또한 온전한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셈이고, 나는 그 집으로 자주 놀러 가는 사람, 숨기도 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거기 네가 있으니 여기 내가 있다고
생각해보는 그런 존재가 되기도 하는.
'꽃밭'의 사전적 의미는 다 아는 대로 '꽃을 심어 가꾸는 밭'인데,
두 번째 의미로는 '꽃이 많이 피어 있는 곳'으로도 나온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사람이 만든 곳이고, 두번째는 꽃들이 스스로 만든 공간인 셈이다.
비슷한 말로 '화단'은 '화초를 심기 위하여 흙을 약간 높게 쌓아 만든 꽃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둘 다 모두 주인이 '꽃', 식물인 셈이다. 그런 마음이 좋다.
내가 아닌 식물에게 내어주는 한 평 혹은 어떤 공간들.
그렇게 만들어놓고 함께 살자고 하는 마음.
꽃밭이라는 말 속에는 그런 마음이 살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은 꽃밭의 크기와는 상관없다. 화분 몇 개를 가까이 두어도 그곳이 꽃밭이다.
그런 마음은 좀 들키며 살아도 된다. 자꾸자꾸 들켜도 된다.
사무실 창가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다육이 몇, 선인장 몇,
책상 위에 한 그루 스킨답서스, 거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화분을 놓아두는 그런 마음,
그런 사람들은 이미 꽃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벌써 맑은 시냇물 한 줄기를 담고서 물을 주는 사람들이다.
내 유년의 화단에 대한 기억은 꽃으로만 기억되진 않는다.
아버지 몰래 구슬을 숨겨놓거나, 모두 버리라고 했던 딱지를 비닐봉지에 싸서
숨겨두던 장소였으며, 여름이면 형들이 서리해온 참외를 숨겨놓고 함께 먹던 장소였고,
죽은 쥐를 묻거나, 깎은 손톱을 버렸다가 혼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들은 거기가 꽃밭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리고 꽃들은 그런 나를 말없이 보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꽃밭'이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뛰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승희의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에서 따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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