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같이 일반 성도에게도 '새롭게 하소서'간증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시냇물
2025.06.24
조회 14
안녕하세요? 늘, 수고많으십니다.

저는 실향민 2세의 애절한 삶을 살면서 받은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67세(여)채진희입니다. 우리들교회 휘문고 강당에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실향민으로 외롭게 사셨던 친정부모님의 삶도 희미해져 가고 토막 토막 기억도 잊혀질 것 같은 애절함을 나누고 싶어서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지켜 주시고 보호하심 속에서 고난의 광야를 걸으며 겪었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제 삶의 이야기입니다.
친정부모님은 평양 중화군 중화면 상전리에서 6.25때 피난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때는 북한이 전기도 많았고 이남보다 살기 좋았다고 합니다. 전기를 팔 수 있는지 이남 사정을 알아보고 사업 구상차 '길 안내자'를 대동해서 내려오시다가 산에서 아버지 졸업장등 여러가지 중요한 서류가 든 베낭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면서 아버지의 인생과 어머니의 인생까지 몽땅 굴러떨어지는 아찔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길 안내자와도 거기서 헤어지고 두 분이 용산구 한강로 3가40번지에 호적을 두고 피난민으로 살아오신 가슴 먹먹한 세월을 묻어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저도 실향민 2세로 힘에 겨운 눈물의 세월을 보내면서 살아왔습니다. 생각만해도 어떻게 두 분이 그렇게 사셨을까?하는 절절함에, 악착같이 살아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착한아이컴플렉스'로 성장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청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모진 세월을 잡고 싶고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 분이 천국에 안기셨습니다.

오라버니는 1949년생으로 6.25를 겪어서 그런지 '심장병'을 앓았습니다. 30대쯤, 서울대병원에서 '심장판막' 수술을 세 번 했지요. 어머니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산리 순복음기도원에 오라버니와 함께 금식기도를 하셨구요. 오라버니는 병세가 짙어져서 결국에는 수술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지금까지 불신자로 사시기에 제 마음이 늘 구원을 위한 안타까움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원에 가서 더 아픈거 너도 봤잖아? 예수믿는 너는 왜 그러니?"하면서 서로 왕래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지럽던 그 시대, 여자들은 결혼을 안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야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 여동생 선생님이셨던 분의 중매로 친정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이남 내려오실 때 여동생을 데리고 내려오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시면서 한평생을 '한'으로 사셨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권사님으로 새벽예배을 고수하시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녀 넷(오라버니, 언니, 저, 남동생)을 출산하고 고향을 그리워하시면서 힘겹게 살아오신 세월에 눈물이 납니다. 제 위 언니를 '홍역'으로 잃으신 후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일본 유학생 시절, 영화관마다 필름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공부하신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셨지요. 특별한 직장도 없이 평생을 사셨고 어머니께서는 여러가지 장사를 하시면서 생활을 꾸려오시다 두 분 모두 '중풍'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살아남는 방어기재는 무조건 공부를 많이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습니다. 친척하나 없고 세상 빽이 없으니 그 방법만이 유일한 세상적 가치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경인교대 교육대학원 다문화전공 석사 과정을 늦은 나이에 마쳤습니다. 논문을 써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나 설 수 없음'을 경험하면서 우둔한 머리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 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29세에 결혼해서 38년째 살아오면서 남편고난, 물질고난, 자식고난의 광야를 거치면서 하나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담임목사님께 남편과의 갈등을 메일로 드렸을 때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라는 답신을 받은 후 캄보디아 교사선교 다년 온 후 우리들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가족신화를 써 내려오면서 잘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도 없었고 모래성을 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련한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60세가 되면, 그동안 이모양 저모양으로 지켜보호해 주신 주님께 감사해서 자비량으로 선교를 가겠다며 기도했었습니다. 결국 캄보디아로 한학기 교사선교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다녀와서 무릎관절이 파열되어 줄기세포 수술 후 회복중 거실에서 넘어져 대퇴부가 골절되어 2차수술을 했습니다. 의료사고로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이상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둔해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서 기복신앙인 '때 부리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하나님 저 불쌍히 여겨주셔서 병원에서도 밝힐 수 없는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내 발목을 잡고 애절하게 기도 드렸는데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고쳐 주셨습니다.

올해 구정에 결혼한 딸이 가족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영종도 파라디이스호텔, 이천 테르메댄한옥에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정 열흘 전부터 왼쪽 겨드랑이와 왼쪽 어깨가 너무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으려고 정형외과를 찾았습니다. 연휴와 여행일정을 고려해 열흘정도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아 복용했지만 겨드랑이 통증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팠습니다. 딸이 찜질방에서 찜질 효과도 있을 수 있으니 약을 먹으면서 가족여행을 권유했고 무엇보다 손주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밤에 끙끙 앓면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니던 가정의학과에 가서 여러 증상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니 신경과 과장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거기서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고, 신경외과 과장님께 진료받을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셨지만 자세한 병명을 모르시겠했습니다. 심장내과로 다시 연결시켜 주셔서 MRA와 CT를 찍었습니다. 큰 병원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결국 분당 서울대병원 척추신경외과에 가서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결국 신경과에서 치료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하시고 어깨 뒷쪽에 수포가 있지만 대상포진 같지는 않다고 하시며 동네 피부과를 한번 찾아가서 진료받고 다니던 병원 신경과를 다시 찾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동네 피부과를 찾아서 전후 사정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모니터에 수십개의 대상포진 상태를 보여주시면서 '대상포진'이 아니라고 하시고 너무 아프니까 약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신경외과, 심장과, 분당서울대 병원에서 준 약, 피부과에서 타 온 약들이 수북했습니다. 한의원에도 가봤지만 병명이 없으니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발목까지 아파와서 동네 정형외과에 갔더니 발목수술을 꼭 해야한다고 하시면서 물리치료도 효과가 없다고 하시며 인하대병원에 연결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제가 저를 생각하니 너무나 불쌍해서 발목을 부여잡고 기도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시라'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친정어머니께서 방바닥을 엉덩이로 밀고 다니셨기에 제가 늘 하던 말이 있습니다. 내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그때까지가 인생이다.라고 말입니다.

지난주에 목장식구들에게 간증하면서 다리 여러번 수술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다시 수술한다는 것이 힘들다고 고백했습니다. 결혼 전 성가대에서 봉사했을 때 편도선 수술을 했어야 했는데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나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옛날같이 때부리는 기도를 하겠다고 간증했습니다. 지지난 주 기도중에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고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목장식구들이 제가 제대로 걷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이렇게 하나님은 노년의 때에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주님을 높이는 딸로 축복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채진희 드림.

추신 : 지극히 평범함이 비범함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고백하는 딸의 기도를 들어주심에 감사합니다.(이산가족 찾기해서 친정어머지 팔촌을 찾아서 어머니 노년에 가끔 부산에 조치원에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친동생을 찾지 못함을 더 그리워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어서. 추신으로 글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