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신앙인생(큰아들추천글)
sks0617
2026.05.24
조회 98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배짱으로 살아온 인생입니다.
제 나이가 올해 일흔인데, 무엇이 자랑이라고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겠습니까. 전 세계로 송출되는 방송이라 저의 부끄럽고 좋지 않은 과거가 다 드러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제가 평생 거짓말쟁이 할머니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에게 만큼은 진실을 전하고 싶어 큰 용기를 내어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거짓 속에 가려졌던 아버지의 진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빚 독촉을 받으러 다니며 자랐지만, 환경 자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원망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다 음식을 대접하면서, 아버지와 시댁을 욕하는 것이 어머니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장에 불이 나자 어머니는 도리어 신이 난 듯했습니다. 어머니의 왜곡된 말들 때문에 아버지는 동네에서 졸지에 바보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작은아버지가 그간의 진실을 밝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서당에서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하고 인물이 좋아, 일본 사람이 유학을 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할머니가 특별히 보냈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부산의 박종화 장로님이 저희 사촌 오빠이기도 합니다. 본래 아버님 가문은 모두 예수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유독 우리 집만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어릴 적 꽤 자신감 있게 자랐습니다. 학교에서 반장 선거에 나가면, 아버지가 반 친구들을 모두 당신의 회사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시며 표를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해주실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서, 어머니의 거짓이 아버지의 귀한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광야에서의 회심
저는 태어날 때부터 돈 버는 머리가 남다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머리를 써서 일을 하면 늘 큰돈이 들어왔습니다. 밑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살다가 첫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저도 동생들을 끔찍이 챙겼지만, 남편 역시 자기 동생들을 지독히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했습니다.

서른 살에 재혼을 했는데, 그 집안은 물질적으로 매우 풍족했습니다. 가족 전체가 건축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라 솔직히 저 역시 물질적인 조건을 보고 결혼한 면이 있습니다. 결혼 당시 경기도 시흥시는 한창 난개발이 진행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파는, 소위 '집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 역시 아버지의 대를 이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산 남천동 신세화백화점 앞에서 스포츠 매장과 접이식 자전거 부산 총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결국 모두 망하고 다시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마흔 살만 되면 돈을 밟고 살 줄 알았는데, 제 인생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무것도 없는 거지가 되어 남편과 처가로 들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타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기도했고, 그다음 날부터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교회에 등록하자마자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을 찾을 줄도 몰라, 매일 아파트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 새벽기도에 데려가서는 "나 성경 구절 좀 찾아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초신자인 저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던 기존 신자들이 참 많았을 만큼, 정말 유별나게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만 가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울음'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게 2~3년을 울며 다녔습니다. 훗날 몽골에 가게 된 것도, 교회 사람들이 사기당할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저를 통로로 삼아 막으려 하셨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중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담임 목사님께서 고백하시기를 "당시에 집사님이 너무 시끄럽게 울며 기도해서 교인들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울지 않으면 어디서 울겠느냐 싶어 그냥 두라고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함으로 감당했던 영적 싸움들
한국에서 3~4년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유학생들을 관리했고, 여성의 몸으로 최초로 북경에 있는 학교들의 문을 뚫었습니다. 일반 유학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제 신앙생활은 늘 평탄치 않았습니다. 제 주변에는 항상 밑바닥 인생들과 사기꾼들이 꼬였고, 저는 교인들이 연루된 자동차 사기 사건, 불륜 사건 등을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두 교회가 모두 알 만큼 큰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기 사건들은 해결하는 데 오랜 세월과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몇 년에 걸쳐 불륜으로 파탄 난 가정을 수습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과거 집장사를 할 때 발생한 세금 문제 때문에 남편의 제안으로 법적(위장) 이혼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자녀들이 중국에 있었고 제가 양국을 오가며 돌봐야 했기에, 남편은 아이들의 양육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저에게 위임해 주었습니다.

중국 현지 교회에서는 한 안수집사가 금전 문제로 목사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교인들에게 목사님의 무능함을 선동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바로잡는 데에도 2~3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이 모든 분쟁을 해결하고 나니,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제 큰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갑작스러운 인도였습니다. 저는 평소 일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곳에서 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일본에 살던 언니는 저와 가치관도, 생활 방식도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니를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하셨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지옥 같던 일본 땅에서의 기적과 훈련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물질마저 없이 시작한 일본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듯 숨이 가빠왔습니다. 겉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속은 타들어 갔습니다. 생계를 위해 면세점에서 일하며 겪은 따돌림과 무시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평생 눈치 보지 않고 할 말 다 하며 당당하게 살아온 탓에, 여자들 무리의 미묘한 심리를 알지 못해 더욱 힘들었습니다. 낮에는 면세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잠잘 시간조차 없이 살았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너무 고달파 교회 제단에 엎드려 우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습니다.

남묘호랑개교(창가학회)를 열렬히 믿던 막내동생을 위해 8년간 눈물로 기도한 끝에 마침내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족들조차 저를 믿어주지 않고 가장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조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 조카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졌고, 집에 머물면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는 "박복순이가 기도한다면서 조카는 왜 저 모양이냐"라는 비방이 유행어처럼 번졌습니다. 새벽 1시든 2시든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성전에 앉아 울부짖었습니다. "왜 저를 이 일본 땅에 보내셨냐"며 하나님께 대들고 싸우듯 기도했습니다. 잠잘 시간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 고통스러운 일본 땅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없었더라면, 저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은 몇 달 만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스무 살 때부터 영적 눌림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조카의 치유에도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요즘 이런 문제를 겪는 젊은이들이 참 많지만, 부모들이 영적 사실을 모르니 그저 정신병원에 가두고 약만 먹입니다. 조카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증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조카를 보며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말합니다. 조카는 완쾌되어 현재 대학교의 정직원으로 당당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명으로 걷는 새벽기도의 길
예전에는 저희 집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의 깊은 산속에 있는 교회로 금요 산기도를 다녔습니다. 당시 제가 출석하던 교회에는 금요 기도회가 없었기에, 제가 부르짖어 금요 기도 모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모든 고된 여정이, 하나님께서 저를 철저히 훈련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평생 돈과 권력 앞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았던 저였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좋았다면 물질이 풍족했던 시댁에 고개를 숙였을 것입니다. 돈과 권력 앞에서는 당당하되, 오직 인격적인 사람 앞에서만 고개를 숙인다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제 기질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처지로 일본에 왔음에도 그 자존심 하나만큼은 여전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저의 그 꺾이지 않는 기질을 쓰시려고, 이곳 일본 땅에서 혹독한 기도 훈련을 시키신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당장 입원하라고 난리를 칠 만큼 저의 육체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당뇨 혈당이 300~400을 넘나들지만, 지난 10년간 약 한 알 먹지 않고 건강하게 버텨내고 있습니다. 나의 육신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오신 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매주 금요일마다 산기도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다 멧돼지를 마주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세상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지금의 교회로 옮긴 지는 이제 3년 정도 되었습니다. 왕복 1시간 거리이지만, 매일 새벽 3시에 제단의 기도 자리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평생의 사명입니다. 지금 저는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위 글은 현재 일본 후쿠오카에 거주하고 계시는 제 친어머니의 생생한 신앙 스토리입니다.
저 또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제가 아들이라는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어머니의 신앙 역사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어떤 장로님이나 권사님들보다도 담대함과 순수함으로 세상의 모진 역경을 오직 신앙 하나로 돌파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세상적인 기준으로도 남다른 수완과 능력을 갖추셔서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 보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인생의 진정한 위대함은 성취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 혼미한 세상의 거센 풍파와 눈에 보이지 않는 더러운 영적 공격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순결한 기도와 담대한 말씀으로 마침내 복음의 승리를 이뤄내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현재 어머니께서는 지나온 삶을 기록하는 자서전을 준비 중이십니다. 그러던 중 문득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 가족들에게는 신앙의 유산을 확증하고, 이 세대와 세상에는 귀감이 되는 당신의 신앙 여정을 간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셨습니다. 평생을 '거짓'과 싸우며 '진실'을 밝혀오신 어머니이기에, 자녀와 손주들에게 당신이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큰 용기를 내어 이렇게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올해 여름이나 가을쯤 한국 방문을 예정하고 계십니다. 이번 고국 방문 길에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제가 어머니 곁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그 수많은 영적 승리의 증거들이 방송을 통해 널리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고통받는 많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나누는 복된 기적이 일어나기를 믿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